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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호 가봄 | 현장스케치
지아정원의 변명
이현정 / 지아정원


※ 지아정원은 황대원 선생님(예술비평가)께 현재 진행하고 있는 ‘우리는 가족이야, 아니야?’라는 지역특성화 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에 대해 두 번의 비평을 부탁드렸습니다. 그 중 첫 번째 글이 도착했고 그 글은 저희가 하는 일과 의도했던 것 사이의 거리를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목적지와 현재의 위치가 요원해진 지금, 막간 비평에서 보이는 우려와 의구심에 대한 대답으로 실패의 경험을 써내려가고자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왜 내가 이 프로젝트에 비평을 써야 하느냐고 물으셨지요. 예술 프로젝트라면 몰라도 굳이 교육 프로그램에 예술 비평이 필요하냐고 말입니다. 떠올려 보면 처음 선생님께 연락을 드렸을 때는 저희 안에서 예술과 교육이라는 분야가 분리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그저 누군가가 우리의 일을 외부의 시선으로 지켜봐주길 바랐고 그래서 이전에 인연(예술 프로젝트에 대한 비평을 써주셨던)이 있었던 선생님께 연락을 드렸습니다. 스스로 하던 일들의 장르가 바뀐 줄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그런 순진함이 지아정원의 동력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애초에 처음 모인 사람들이 시각예술 분야와는 무관한 사람들이었으니까요. 계획보다는 순간순간의 판단과 손에 잡히는 것들로 작업을 했었고 오히려 의외의 결과물들을 만들어 냈었죠. 예술적 시각에서 보더라도 꽤 괜찮은 작업이었습니다. 우리가 경험했던 일들이 주위 사람들에게도 전달되길 바랐습니다. 그런 내적 성취가 문화예술교육을 통해 외부로 확장되길 바랐습니다. 
 
 한데 교육이라는 이름이 붙는 순간 뭔가 어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으로 진행했던 교육프로그램인 ‘타인의 자리’, 그 첫 수업이 대표적이었습니다. 나름의 고민과 노력으로 ‘쿵푸팬더로 보는 교육론’이라는 피피티를 준비했었죠. 결과는 아시는 대로입니다. 부모님들은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기 바빴고 그나마 첫 만남이라는 긴장감이 지루한 시간을 견디게 했습니다. 불을 꺼놓은 탓에 부끄러운 표정들을 감추기에는 좋았습니다. 그 수업은 교육이라는 이름의 전형성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습니다. 강사들은 무엇인가 의도해야 하고 그것을 전달해야 한다는 사명에 따라 움직였습니다. 일정한 수업시간 안에 일정한 결과물들을 만들어 내는 것을 일종의 교육적 불문율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무리한(예기치 못한) 과정들보다는 무난한(결과가 뻔한) 것들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원하던 바와는 반대로 무난한 과정이 무리하게 주입되고 있었습니다. 

 이제야 선생님께 연락드린 이유를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교육과 예술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쫓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열심히 노력한다면, 혹은 두 배로 노력한다면 가능한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한 마리 사자와 한 마리 토끼를 한 우리 안에 집어넣는 일이었습니다. 사자는 지루함을 견디지 못해 힘들어하거나 행여 토끼를 잡아먹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예민하고 상처받기 쉬운 예술적 감수성은 교육적 억압이 보이는 순간 멀리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대로 둔다면 두려움을 못 이긴 토끼가 죽어 나갈 운명이었습니다. 이것이 교육이나 공동체 활동에 기반을 둔 시각이 아닌 선생님의 관점, 예술 비평의 시각으로 바라봐주길 부탁드린 이유입니다. 배부른 사자 곁에 토끼 가죽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건 아닌지, 이미 토끼가 달아나고 없는 건 아닌지 살펴봐 주십사하고 말입니다. 
 
 현장을 방문해 수업 내용을 보셨을 때의 말씀도 기억에 남습니다. ‘우리는 가족이야, 아니야?’가 주위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만들기 체험들과 어떤 면에서 다른지 혹은 그 이상의 것들이 있는지 실망스러운 눈빛으로 물으셨습니다. 모두가 암묵적으로 알고 있던 비밀이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앞니에 낀 고춧가루 같았습니다. 더는 웃을 수 없었습니다. 그날 저녁, 우리는 서로의 잘못을 캐묻고 서로를 탓하고 원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날 보셨던 수업은 손바닥만 한 크기의 인형과 의자였습니다. 그리고 그 둘의 대화를 쓰고 발표하는 자리였죠. 시각적으로 초라한 것들이었습니다. 인형과 의자의 크기가 발표한 내용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시각과 청각이 따로 놀고 있었습니다. 발표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온전히 몰입하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그것은 작년 ‘타인의 자리’에서 했던 6주간의 내용을 2주로 압축한 수업이었습니다. 인형을 만드는 시간도 그 인형의 의자를 만드는 시간도 반의반밖에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인형과 의자의 크기도 반의반 토막이 나버렸습니다. 작년의 과정에 여러 내용을 덧붙인 결과였습니다. 하고 싶은 게 늘어난 만큼 해야 할 일들도 늘어났습니다. 한 과목만 파느라 시험 전체를 망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처럼 지금 주위에는 수많은 체험 프로그램들이 있습니다. 캠핑, 주말농장, 학원 활동 그리고 미술관, 도서관과 같은 공공기관의 프로그램 등 굳이 지아정원이 아니어도 갈 곳은 많습니다. 그러니 이것들과 경쟁해야 하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교육을 백년지대계라고 부르는 것은 교육을 하는 데 있어 일희일비하지 말고 백 년을 엮어내라는 뜻으로 읽힙니다. 결국, 교육의 진정성은 짧게는 한 번의 수업이 앞뒤의 그것들과 얼마만큼 연결되어 있느냐로, 길게는 지금의 행위를 20년 전 그리고 20년 후의 일들과 어떻게 엮어내느냐로 판가름 날 것입니다. 그날의 수업은 여느 체험프로그램과 다를 바 없는 한낱 에피소드에 불과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앞의 에피소드가 배경을 만들고 뒤의 에피소드가 더 큰 사건으로 전개될 때 파편들은 서로를 부여잡고 하나의 이야기를 만듭니다. 지금의 모자란 시각적 자극이 이후의 일들에 복선으로 비치길 바랄 뿐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기획의 취지인 ‘낯선 가족관계에 이름을 부여하는 시도는 어디에 있나’라는 질문을 주셨습니다. 또 참여자들이 그런 의도와는 무관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셨습니다. 사실 기획의 의도가 어떻게 전달되고 있는지 생각도 못 하고 있었습니다. 그날그날의 수업을 해치우기 바빴습니다. 하나의 수업을 준비하고 하나의 수업을 마치면 금세 다음 수업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습니다. 처음 짰던 내용과 일정에 끌려다니고 있었습니다. 일주일이 참으로 빨리 지나갔습니다. 이런 질문을 통해서야 다시금 생각할 기회를 가졌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깁니다. 3분의 2 정도의 여정이 지난 지금, 처음의 목적지와 지금의 위치를 곱씹어봅니다. 

 이번 프로젝트는 작년부터 함께 했던 한 아이의 질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제목 그대로 “우리는 가족이야, 아니야?”라는 질문이었습니다. 그 아이는 아직은 아빠가 아닌 삼촌과 살고 있었고 실제 아빠와는 주기적으로 만났습니다. 그러니 아이에게는 삼촌을 가족으로 넣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가 고민이었습니다. 그러다 아이는 천진난만함으로 이 위기를 극복하게 됩니다. 주말에 잘 놀아주는 삼촌에게 ‘주말 가족’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그 후 아이는 삼촌을 (주말) 가족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기획의 내용은 이 아이의 경험을 장황하게 써 내려간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얼마나 많은 참여자가 이런 내용과 부합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참여자들이 설정한 대상마저 친족 관계가 대부분입니다. 상세한 가족사를 듣고 해결책을 찾는 것이 이 자리의 목적은 아니니 더는 캐물을 수도 없습니다. 그저 첫 자리에서 함께 기획서의 내용을 읽어봤을 때처럼 “뭔지 모르지만 좋은 거 같다.”라는 말과 계속 참여해 주시는 열의 정도면 기획의 의도는 충분히 전달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앞서 이야기했던 아이가 학교 친구들에게는 삼촌과 함께 산다는 말을 못 하지만 지아정원의 친구들에게는 스스럼없이 말한다고 합니다. ‘낯선 가족관계에 이름을 부여하는 시도’를 ‘낯선 가족관계를 스스럼없이 인정하는 태도’로 변주해도 좋을 것입니다. 이름을 부여한다는 것은 낯선 것들을 서로가 인정할 만한 일, 있을 법한 일로 만드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기획의 의도는 참여자들을 만나며 낯선 것에 이름을 부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낯선 이름이 통용되는 공간을 만드는 것으로 확장되고 있었습니다. 

 또 낯선 가족관계를 들고 나온 참여자분들이 적다는 것도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평범하게 여겼던 가족 관계가 낯설어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부부 간의 또는 자식과 부모 간의 역할과 의미부여가 가정마다 그리고 가족 구성원마다 제각각이었습니다. “당연한 거 아냐?”라는 물음에 “당연한 게 어딨냐?”고 되묻습니다. 오히려 이혼과 같은 불편한 상황에 명백한 동의가 따라붙곤 합니다. 서로의 속내를 알아갈수록 가족이라는 이름이 안전한 울타리가 아닌 아찔한 외줄타기처럼 느껴집니다.    
 저는 아줌마입니다. 지아정원을 찾는 분들도 대부분 아줌마, 아저씨들입니다. 아이들의 꿈과 노부모님들의 현실을 책임지는 사람들입니다. 꿈과 현실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닌 모드를 전환하며 부지런히 오가야 할 삶의 일부입니다. 멋진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지만 이내 ‘그런데 그게 가능할까’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립니다. 현실감각은 제자리에 멈춘 듯이 보이지만 실제로 쉴 새 없이 좌우로 휘청거리는 긴장의 연속입니다. 작은 변화에도 얼마나 많은 노력과 용기가 필요한지 서로가 알고 있습니다.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는 프로이트의 평전에 ‘어떤 힘의 크기를 측정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것이 얼마만큼의 저항력을 이겨내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라고 썼습니다. 이 문장으로 지아정원의 변명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어설픈 칭찬은 고래를 병들게 할 뿐입니다. 따끔한 질문과 따뜻한 충고가 소중한 이유입니다. 선생님의 시선으로 지아정원은 더 건강한 공간이 될 것입니다. 지금의 변명과 핑계가 이야기를 만들고 이야기처럼 사는 삶이 예술적 가치와 함께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마지막 전시에서 뵙겠습니다. 


※ 황대원 선생님의 글은 지아정원 홈페이지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http://gagarden.co.kr/?p=859


지지봄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