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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호 곁봄 | 칼럼
상상력의 징후에 대한 내밀한 자기고백(기획의 변)
김월식 / 무늬만커뮤니티 디렉터


예술가에 의한 예술가를 위한 예술가의 문화예술교육 


 오래된 생각이다. 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몇 가지 질문의 답을 구하느라 이리저리 방황하며 고민의 출구를 찾으려 했지만 대체로 돌아오는 답은 또 다른 질문과 흔들리는 신념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아마 미리 확정해 놓은 예술(가)의 신화적, 종교적 은혜로움이라는 가당치 않은 가설이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개인과 몇 안 되는 주변인들의 경험으로 이 가설을 주장한다는 것이 우리만 즐거운 ‘그들만의 파티’가 될 수도 있다. 사실 예술가들의 미에 관한 탐구가 흥미롭지만 그런 예술가를 만나는 일이 쉽지 않은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고집과 아집, 소통 부재의 삶에서 나오길 꺼리는 예술가들과 이미 세상의 언어가 되어버린 자신의 예술을 인지 못 하고 낭만적인 자기방어에 익숙한 예술가들과의 교류는 안타깝고 부끄러운 변명의 향연 같은 아이러니한 나락의 상실감을 안겨 주었다. 어쩌면 30년 가까이 예술가로 살아오면서 숱하게 보아왔던 예술(가)의 편협한 삶을, 예술을 보편과 타당이라는 로직의 알고리즘으로 번역한다는 것이 처음부터 모순된 욕심이었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불편한 심정을 뒤로하고 ‘상상력의 징후’는 시작되었다.


목적이 무엇이든지 과정은 늘 다르다

 무슨 호기로움이었을까? 몇 해 전부터 문화예술교육 현장의 열정에 반하는 안타까운 접근들에 대한 대안으로써 생각하게 된 이 신념 같은 아이디어를 실현하고자 여러 자리에서 ‘상상력의 징후’에 대한 이야기를 설파했고, 결국에는 경기문화재단의 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에서 이 제안을 흥미롭게 받아들여 모든 시작이 가능했다. 많은 사전 회의를 통해 의미에 대해 공감하고 가능성을 감지했지만, 결국 언어적 의미가 가진 예술(교육)의 특수성이 선명하게 전달될지는 의문이었다. 말을 모으고 다듬어 ‘상상력의 징후’에 대한 타당성을 만들었지만 무언가 부족한 느낌을 메울 수는 없었다. 말 그대로 ‘징후’에 대한 불확정적인 개념을 온전하게 전달할 만큼의 정의를 유보하고, 열려있는 개념으로서 참여자가 그 의미를 완성하는 방식의 워크숍 초안을 만들고 이것이 결국 ‘상상력의 징후’를 설명하는 목적이 되었다. 견고한 목적이라도 전달 과정에서 흔들리고 해체되는 경험을 많이 해 보았다. 그래서 이 열린 개념이 온전하게 워크숍 끝까지 전달될지, 마지막에 어떤 결론에 도달할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참여하겠다는 예술가들이 모이고 결국 우리는 이 불투명한 워크숍 안에서 불안하게 더듬거리는 자신들을 목도했다. 더듬거리는 것은 분명 예술의 징후이지만 쉽게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이다. 이 감각에 다가서기 위해서 처음 작성했던 모호하게 열린 ‘상상력의 징후’의 개념을 역추적해보기로 한다. 징후와 시작, 과정과 결과의 구조로는 부족한 예술(교육) 그 내부의 민낯을 보기 위해서 말이다.


홍보 초안과 결과의 창의적인 거리

 ‘상상력의 징후’의 초안과 워크숍의 과정에서의 흔들림, 마치고 난 이후의 단상을 정리해본다. 
 
초안

‘상상력의 징후’는 예술가들이 창작하기 전에, 혹은 창작 중에 발생하거나 개입되는 다양한 신호나 행동, 사건들이 예술가들의 창작 과정에서의 창의력, 상상력, 수행력들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또 그렇게 감지되는 징후들이 문화예술교육에 있어서 상상력의 통로를 여는 가능성이 될 수 있을지를 실험하는 워크숍이다. 온전하게 예술가들에 의한 예술가들을 위한 예술가들의 창작 실험과 이를 상상력의 가능성으로 읽고 문화예술교육의 언어로 번역해줄 모더레이터, 이 모든 과정을 객관적 관점에서 기록해줄 기록자들이 함께 이 워크숍에 참여한다. ‘상상력의 징후’는 많은 예술가가 문화예술교육 현장에서 자신들의 예술 철학에 기반을 둔 창작 작업을 문화예술교육의 철학과 언어로 번역하는 것을 힘들어하거나, 교육에 대한 편견과 강한 교육적 프레임에 갇혀 예술가 본인이 갖고 있었던 예술 철학과는 동떨어진 혹은 전혀 다른 교육적 관성의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에 대한 고민과 문제 해결을 위한 모색으로써의 실험적 워크숍이다. ‘상상력의 징후’는 예술가의 머리와 몸, 마음을 작동시키는 기제의 추상성을 구체적인 감각으로 체험하고 인지하며 이를 공유의 장에서 차이와 공감의 이슈를 바탕으로 예술가 스스로 재해석하는 과정이다. 예술(작업, 창작)을 시작하기 전, 그 분명한 신호 안에 설정된 다양한 창의와 상상, 창작 의지의 알고리즘의 세계를 쉽게 파악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래서 ‘상상력의 징후’는 매력적이다. 이해와 오해 사이에 ‘상상력의 징후’는 존재하고 결정적 단서를 뺀 단단한 심증으로 그 상상력을 호명한다.


과정과 결과의 단상들

 “ ‘상상력의 징후’는 예술가들이 창작하기 전에, 혹은 창작 중에 발생하거나 개입되는 다양한 신호나 행동, 사건들이 예술가들의 창작 과정에서의 창의력, 상상력, 수행력들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또 그렇게 감지되는 징후들이 문화예술교육에 있어서 상상력의 통로를 여는 가능성이 될 수 있을지를 실험하는 워크숍이다.”
 
- 창작하기 전에는 다양한 시그널들이 존재한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나 조각을 하는 예술가는 대체로 관찰이 그것이다. 그 관찰은 숱하게 보아 왔던 일상의 풍경이 대상일 수도 있고, 여행 중이나 낯선 곳에서 포착된 기이한 대상일 수도 있다. 이 모든 대상이 아름답거나 추하거나 혹은 추상적인 감정으로 작가를 혼란하게 하더라도 작가의 미적 관점에 포획된 대상은 강렬하게 작가의 인식에 자리 잡게 되고 이는 곧 상상을 발동하는 기제가 된다. 그런데 대상을 관찰하는 방법과 속도가 제각각이다. 작가는 찰나(刹那)의 감각으로 셔터를 누르는 손, 붓질하는 손까지의 거리를 최소화하기도 하고, 한 대상을 길고 오랜 시간 응시하면서 대상의 존재, 혹은 대상과 풍경과의 관계, 대상의 이면 등을 맘껏 상상하며 표현의 수위를 설계하기도 한다. 동시대 예술가는 이 관찰의 개별적 특성이 작업을 진행하는데 매우 중요한 작동 기제임을 인지하고 더욱 다양한 방법과 속도로 관찰한다. 

 예술가는 시각적 차원을 넘어서 오감을 모두 개방하여 관찰하는데, 심지어 오감을 넘어서는 육감적 관찰을 상상의 채널로 활용한다. 보이지 않는 부분을 보는 것은 샤먼과 예술가에게만 주어진 유일한 특권일 수 있다. 죽은 조상을 불러내 그들과 소통하는 샤먼과 타인이 보지 않은 미감을 대신 발견하거나 기록해 타자에게 보여주는 예술가는 모두 현실적으로 보이지 않는 영역을 보이게 하는 특이한 재주를 가졌음이 틀림없다. 그래서 예술가는 때로는 보이지 않는 부분을 보기 위해 손과 몸으로, 혀와 코로 관찰한다. 음악 장르의 예술가에게는 귀로 관찰하는 것이 특히 중요한 창작 기제일 것이다. 그런데 비단 음악 장르의 작가뿐 아니라 타 장르 예술가에게도 청각을 통한 관찰이 만드는 창작의 통로는 매우 중요한 ‘상상력의 통로’가 된다. 작가의 관찰은 생각보다 편협하고 자기중심적이다. 말하자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보고도 못 본 척한다. 매우 미세한 감각으로 돋보기 현미경을 뛰어넘는 미시적인 영역의 내부를 들여다보고, 숲을 보느라 나무를 아예 보지 않기도 한다.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던 손끝의 감각에 포착된 그곳에 천착하기도 하고, 또 어떤 예술가는 손끝에 포착된 그곳을 천착하는 몸의 감각으로 상상력을 발동한다. 한 가구 디자이너는 가구를 만들 때 자신이 가구가 되는 상상을 하면서 가장 편안한 가구의 형태로 몸을 만든다고 한다. 그리고 그 위에 다른 사람이 온전하고 편안하게 앉아 있는 것을 상상하면서 그 구조대로 가구를 제작한다고 한다. 결국 본다는 것은 오감과 육감을 넘는 몸의 감각을 입체적으로 날을 세워 관찰하는 것이고, 이 입체적 관찰이 작가의 개별적 관찰 및 성찰, 실천의 속도와 연동된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우리는 매일 보며 살아가는데 그 관성 때문에 어쩌면 아무것도 못 보는 것일 수 있고, 나의 보는 방법은 나의 상상력을 만드는 모든 징후가 된다. 

 ‘상상력의 징후’ 워크숍 도중 참여한 예술가는 자신의 보는 습관과 방식을 공유했다. 작가적 관찰이란 매우 첨예하게 사적이면서도 공개하기 꺼려지는 부분이 있는 비밀스러운 창작의 영역이기 때문에 실제로 깊은 이야기가 공유되지는 못했다. 다만 어떤 작가든지 자신이 보고 있는 세상을 말하면서 더듬거리고, 주저하고 부끄러운 듯 말의 호흡을 조절했다. 말과 사유가 동시에 혼재하면서 타자를 바라보는 작가들의 시선에는 또 다른 생각의 징후들이 포착되는 듯했다. 작가의 생각과 상상력이 개인의 영역을 넘어서 타자와 비로소 만나는 첫 지점의 떨림과 흔들림, 그리고 그 흔들림을 뚫고 나오는 개인의 소리가 모두 그 예술가의 시그널이다. 이 불확정적이고 불가해한 소통이야말로 또한 ‘상상력의 징후’가 된다. 심정적이고 직관적으로 답을 향해 무한 수렴하고 있는 관찰과 상상의 긴장에는 무한한 우연과 오해의 개입이 존재할 수 있고, 그 헤아릴 수 없는 파장 속에 예술이 위치한다. 

 “온전하게 예술가들에 의한 예술가들을 위한 예술가들의 창작 실험과 이를 상상력의 가능성으로 읽고 문화예술교육의 언어로 번역해줄 모더레이터, 이 모든 과정을 객관적 관점에서 기록해줄 기록자들이 함께 이 워크숍에 참여한다.”

- ‘상상력의 징후’에 참여한 참여자와 모더레이터, 워크숍의 전 과정을 기록하는 사람도 모두 예술가이어야 한다는 사전 약속이 있었다. 그래서 모든 참여자는 각자의 포트폴리오를 소개하는 시간이 필요했고, 모더레이터 역시 본인의 포트폴리오를 모두에게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모더레이터는 예술 장르, 매체와 상관없이 참여 예술가들의 창작과정과 결과물에서 ‘상상력의 징후’를 읽고 이를 다시 여러 참여자에게 전달하였다. 교육적 언어 구사를 불편해하는 예술가나, 본인의 작업에서 문화예술교육적 가능성과 프로세스를 인지하지 못 하는 작가에게 본인의 작업이 갖고 있는 교육적 잠재성을 일깨우는 매개자의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모더레이터로 참여한 한 예술가는 작업 결과물에 숨어 있는 창의적 경로를 끊임없이 읽어주면서, 작가가 본인의 이야기를 불편해하지 않고 말할 때까지 섬세하게 배려하며 기다려주었다. 이 모더레이터는 다양한 예술의 언어를 교육에 필요한 적절한 언어로 번역했던 경험이 풍부하였고, 예술가이자 교육자의 정체성을 갖고 있었다. 또 다른 모더레이터는 작업에 접근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사람들과의 협업에 경험이 많은 예술가로 다양한 매체를 유연하게 융합, 해체하면서 작업 과정에서 발생하는 여러 사건과 우연적 상황을 메시지에 개입시키는데 자유로운 작가다. 모든 모더레이터가 유머를 작업의 한 태도로 숨겨두었고 이 모든 기제가 참여자의 창작적 기제와 만나 ‘상상력의 징후’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과 고민을 만들었다. 

 “ ‘상상력의 징후’는 많은 예술가가 문화예술교육 현장에서 자신들의 예술 철학에 기반을 둔 창작 작업을 문화예술교육의 철학과 언어로 번역하는 것을 힘들어하거나, 교육에 대한 편견과 강한 교육적 프레임에 갇혀 예술가 본인이 갖고 있었던 예술 철학과는 동떨어진 혹은 전혀 다른 교육적 관성의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에 대한 고민과 문제 해결을 위한 모색으로써의 실험적 워크숍이다.” 

- ‘상상력의 징후’에서 예술가들의 상상력을 작동시키는 기제에 주목한 이유는 제도 안의 많은 문화예술교육에서 단순화된 접근 방법과 사례가 공유되면서 정체성과 변별성이 없는 교육이 양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반성과 대안으로써 새로운 발상과 접근, 실천력을 갖춘 문화예술교육을 위한 예술(가)적 실험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상상력의 징후’는 출발하였다. 

 예술가들은 종종 예술교육 현장에서 예술강사의 역할을 담당할 때 실제 자신의 창작 세계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전형적인 예술교육’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마치 문화예술교육은 ‘이렇게 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다. 이는 그동안의 문화예술교육 프레임이 교육적 설계와 과정, 목표와 결과가 분명한 안전하고 견고한 접근에 기반을 둔 설정이었기 때문이다. 제도 안의 예술교육은 정해진 시간 안에 목적과 과정을 수행하고 결과를 만들어 내는 시간과의 긴장이 중요하다. 또 윤리적이며 안전하고 정서적으로 순화된 언어와 접근만을 허용한다. 그래서 제도 안의 예술교육은 검증된 콘텐츠 외의 상상과 접근을 가지고 교육을 수행하는데 많은 장벽이 있다. 교과서 안의 예술은 지식과 정보를 제공해야 하고, 정해진 시간 안에 완성을 요구하므로 개별적 사유와 실천이 개입될 수 있는 중요한 단계를 친절하게 압축하여 전달한다. 이러한 미적 교육을 통한 경험은 교육 대상자의 심미적 경험을 단순화하면서, 예술에 대한 보편적 사고를 전체화하는데, 이 부분이 예술(교육)에 대한 전형을 만들기도 한다. 동시대 예술 언어의 비선형적이며 부조리한 부분을 애써 번역하여 사회와 학교, 교사와 학부모를 설득하는 과정에서의 불편함을 마주하기 싫은 예술가는 제도 안에서 통용되는 보편적 언어와 접근의 예술(교육)로 되돌아간다. 친절하고 안전한 제도적 예술교육은 결국 교육의 프레임이라는 동시대성의 자기 기만적 상식망 안으로 예술(가)을 가두는 관성이 있다. 결국 동시대의 문화예술교육은 가치와 내용 중심으로 확장되지 못하고 늘 이해하기 쉬운 상식적 예술 장르의 기능교육을 넘지 못하는 한계를 보이기도 한다. 

 “ ‘상상력의 징후’는 예술가의 머리와 몸, 마음을 작동시키는 기제의 추상성을 구체적인 감각으로 체험하고 인지하며 이를 공유의 장에서 차이와 공감의 이슈를 바탕으로 예술가 스스로 재해석하는 과정이다.”

- 이러한 측면에서 ‘상상력의 징후’는 워크숍 참여 작가의 다양한 창작 기제를 보편적 교육언어로 직접 번역하는 과정을 워크숍 설계 단계에서 지워버렸다. 수년간 예술교육 매개자의 역량강화 프로그램은 예외 없이 워크숍의 결과 단위에서 교육 안을 만들고 그 교육 안을 실습으로 연결하는 것이었다. 다양한 브레인스토밍과 사례의 교류, 멘토링을 받은 매개자들은 구조가 이미 설계되어 있는 행정 서류 양식에 크고 작은 변화와 성찰의 철학을 써넣는다. 이 과정에서 다시 예전의 제도적이며 관성적 예술(교육)의 언어로 회귀하고, 행정 서류 양식이 원하는 설계 방식으로 내용을 압축시킨다. 몇 년 동안 수차례 진행된 이와 같은 역량강화 워크숍에서 예술(강사)가의 확장된 교육적 접근과 실험의 가치를 매우 쉽게 패턴화시키는 경향을 발견하였고, ‘상상력의 징후’에서만은 다시 되풀이하지 말자는 의견은 가장 중요한 워크숍의 태도가 되었다. 그래서 일련의 과정을 대체할 장치로써의 모더레이터와 기록자의 역할이 중요했다. 모더레이터는 워크숍 과정에서 참여 예술가의 창작 기제에 대하여 다양한 상상의 여지와 경로를 함께 읽어주고, 예술가는 그 언어에 각자의 언어와 철학으로 화답한다. 때로는 아무 말 대잔치 같은 애매하고 모호한 소통이 지루하게 이어지기도, 단절된 대화 속으로 침묵이 개입되기도 하지만 참여자들이 겪는 즉자적인 소통의 과정을 기록자는 여과 없이 자신의 언어로 기록한다. ‘상상력의 징후’에는 ‘기록자의 언어’라는 세 번째 번역 과정이 존재하는데 기록자들은 대화와 소통을 일방적으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관점을 반영하여 현장을 기록한다. 이 기록이 참여자들에게 예술(교육)의 정답이 아니라 질문과 답, 고민과 문제의식을 만나는 또 다른 ‘상상력의 징후’가 되길 기대하면서. 

 “예술(작업, 창작)을 시작하기 전, 그 분명한 신호 안에 설정된 다양한 창의와 상상, 창작 의지의 알고리즘의 세계를 쉽게 파악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래서 ‘상상력의 징후’는 매력적이다. 이해와 오해 사이에 ‘상상력의 징후’는 존재하고 결정적 단서를 뺀 단단한 심증으로 그 상상력을 호명한다.” 

- 아무도 예술가의 창작 이전의 다양한 작동 기제에 대해서 단정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 수없이 많은 예술(가)의 가치는 단정 지을 수 없는 다양함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 다양성은 예술의 다양성이지만 예술가의 다양성이면서 삶의 다양성이다. 태어나기 전부터 DNA 속에 내재되어 있는 기질의 총화와 성장하면서 만나는 다양한 사람, 사건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개별적 정체성이 예술(가)의 언어를 구사하게 한다. 우리는 이런 다양성을 학습으로 이해하고 수긍할 수 있지만, 결국 개별적 상상력을 통한 주체적 삶의 성찰과 실천은 스스로 깨치지 않으면 쉽게 자기 것이 될 수 없는 마음 같은 것이다. 몸은 움직여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때 느끼는 거짓의 상태를 사람들이 견디기 힘들어하고, 불편해하는 까닭과 비슷하다. 우리는 ‘상상력의 징후’를 통해 다양한 예술가의 창작 이전과 창작 과정의 기제를 읽는다. 예술(가)의 다양성만큼 기제 들은 다양하고, 실제로 이러한 이유로 창작이 가능할 수 있을지에 대하여 놀라기도 하고 의아해하기도 한다. 그래서 매일 맞이하는 아침이, 아침 밥상에서 밥을 먹는 행위가, 밤에 일상의 피로로 고단한 몸을 눕히고 잠을 청하는 행위가 어떤 사람에게는 평범한 삶이 되기도 하고 또 어떤 이에게는 창작의 기제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실제 2017년을 살아가는 동시대 75억의 세계 인구가 맞이하는 아침과 저녁의 잠자리가 같지 않듯이, 어떤 예술가의 아침밥은 따듯함과 초라함, 아름다움과 추함, 즐거움과 불행함을 관찰하고 사유하게 한다. 특정한 아침 식탁의 풍경이 예술가의 언어로 번역되어 미술관에 전시되기도 하고, 공연장의 무대로 오르기도 한다. 우리가 일상의 낯익은 풍경을 전시와 공연으로 쉽게 볼 수 있는 것처럼, 동시대를 살아가며 관찰과 사유 속에서 새로 발견된 독립적인 의미와 가치들은 이미 삶의 풍경 속에 가득한 것이다. 어쩌면 우리의 예술교육은, 문화예술교육은 근대의 장르적 예술 결과물의 권위에 익숙해져서 그 결과를 만드는 기술적 경로에만 치우치지 않았는지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 그리는 기술과 행위 이전에 그리는 자가 무엇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 그 판단의 주관적 해석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고민해야 한다. 또한 그것을 그리고, 연주하고, 쓰도록 결정했을 때 사용하는 언어(매체)는 누가 선택했고, 그 언어가 본인의 언어로 사용하기에 불편함이 없는지, 불편을 감수하고도 지속해볼 의지가 발동하는지 등의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런 전제는 무척 피곤하고 시간과 공력이 많이 든다. 사실 이런 전제 없이도 우리는 그동안 그럭저럭 문화예술교육을 별 탈 없이 잘 성장시켜 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상상력의 징후’에서만큼은 이 전제들이 우리를 주의 깊게 관찰하고 성찰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끊임없이 사유하고자 했던 고단한 시간의 정체가 실천을 만들기 위한 주체적 사유의 시간이었고, 결코 버리거나 무시하기 어려운 마음을 사용하는 시간이었음을 잊고 싶지 않다. 그렇게 쌓이는 마음은 문화예술교육의 또 다른 혹은 새로운 가치와 과정을 상상하게 한다. ‘상상력의 징후’는 그런 것을 마음에 품는 신념의 문제와 맞닿아 있는 것이다.


목적 없는 합목적성

 “욕구 능력은, 그것이 단지 개념에 의해서만 즉 목적의 표상에 적합하게 행위 하도록 규정될 수 있는 한, 의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어떤 대상, 마음 상태 또는 어떤 행위 등의 가능성이 목적의 표상을 필연적으로 전제하지는 않을지라도, 우리가 목적에 의한 인과성을, 즉 어떤 규칙의 표상에 따라 그 대상이나 행위 등을 그렇게 정해 놓은 하나의 의지를 그 근거로 가정하는 경우에만, 비로소 그것들의〔어떤 대상, 마음 상태 또는 어떤 행위 등의〕 가능성이 우리에게 설명될 수 있고 이해될 수 있다고 하는 이유만으로도, 그러한 대상이나 행위 등은 합목적적이라고 할 수 있다.”[각주:1] 

 ‘상상력의 징후’를 준비하면서 칸트의 ‘목적 없는 합목적성’이 중요한 레퍼런스가 되었다. 징후가 목적의 표상을 필연적으로 전제하지는 않을지라도 ‘상상력의 징후’가 문화예술교육에 타당한 합목적성을 갖추었다는 믿음을 채찍질하는 텍스트로써 ‘목적 없는 합목적성’은 매우 중요한 영감이기도 하였다. 
 

 결국 우리가 워크숍을 통하여 포획한 징후 안에는 더듬거리기, 조몰락거리기, 치유를 위한 시간 보내기, 자기 탐색의 시간, 축적, 매개와 매개의 관계, 소문과 팩트, 불편한 질문하기, 탈 학습된 자기 경로는 찾아가는 탐색 과정, 어색함, 미시적이고 탐미적인, 우연, 꼬리에 꼬리를 무는, 대칭적 촉각성, 통합적 사고를 원하는 혹은 시키는, 몸의 생각, 통해서 보는 읽는 세상, 감각의 번역, 쉬운 너무도 손쉬운, 애틋함, 기다림, 실천과 수행이라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면서 또 구체적인 합목적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제 우리는 이 징후의 정체를 암묵지에서 호명했으며, 호명된 징후들이 문화예술교육의 언어로 번역되는 또 다른 수고의 과정이 필요하다. 우리의 예술처럼 말이다.




  1. 김상현, 『철학사상』 별책 제5권 제6호 칸트 『판단력 비판』,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05, p.7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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