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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호 곁봄 | 칼럼

'몸소 겪는다'는 것

김소연 / 연극평론가

 이번 호 지지봄봄의 주제는 체험에서 경험으로. 체험과 경험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사전적 정의는 이렇다. 체험 : 자기가 몸소 겪음. 또는 그런 경험. <심리> 유기체가 직접 경험한 심적 과정. 경험과는 달리 지성언어습관에 의한 구성이 섞이지 않은 근원적인 것을 이른다. <철학> 주관과 객관으로 나누기 전의 개인의 주관 속에 직접적으로 볼 수 있는 생생한 의식 과정이나 내용. 경험 : 자신이 실제로 해 보거나 겪어 봄. 또는 거기서 얻은 지식이나 기능. <철학> 객관적 대상에 대한 감각이나 지각 작용에 의하여 깨닫게 되는 내용. 철학사전의 정의는 이렇다. “생철학에서 쓰이는 용어. 경험이란 용어와 비교하여, 경험이 인식적 의미, 즉 무엇인가에 대해 안다는 의미로 쓰이는 것에 대하여, 체험은 개별 인간에 있어서 지적(知的)인 것만이 아니라 정의적(情意的) 요소도 포함한 의식 활동 전체의 상태를 가리키는 극히 주관적인 의미를 가지는 말이며, 반드시 대상과의 관계를 맺을 필요는 없고 정신작용 내에서만 나타나는 것까지도 포함한다. 생철학은 이러한 의식상의 사실을 기초로 하여 세계나 인생의 진상을 밝히려고 한다. 이 용어는 독일어 특유의 것으로 다른 유럽어에서는 경험(experience)에 특정한 설명을 덧붙여 체험이라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네이버 지식백과] 체험 [Experience, 體驗, Erlebnis] (철학사전, 2009, 중원문화))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체험과 경험은 거의 동어반복에 가까울 정도로 비슷한 의미이지만,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다. 체험과 경험은 몸소 겪음이 의미의 중심을 이루지만, ‘겪음의 형식이나 내용에서 주관/객관, 정의(情意)/() 등의 차이를 구별하고자 할 때 양자를 갈라서 말한다. ‘체험경험을 구별하고자 하는 지지봄봄의 의도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감각의 과정을 제거하는 체험교육

 

 문화예술교육(부터 교육 전반)에서 체험이 강조되는 것은 바로 몸소 겪음의 중요성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흔히 만나게 되는 체험 교육들에서 몸소 겪음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어떤 예. 수년 전 아이들과 함께 간 어린이 전시실의 체험 활동은 파편들을 맞추어서 빗살무늬 토기의 형태를 완성하는 것이었다. 평면적 퍼즐 맞추기를 공간화하기 위해서인지 이미 토기의 형태를 갖춘 틀에 파편들을 자석으로 붙여 넣는 것이었다. 과연 이러한 체험 활동에서 몸소겪음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이 프로그램에서 직접 제 몸을 움직이는 것이란 조각을 집어서 마련된 틀에 붙이는 것이다. 조각들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모형이었고, 당연히 흙으로 빚어진 토기의 질감을 느낄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 프로그램의 몸소란 조각 집기이다. 영아 손 근육 활동이 아니라면 이것을 과연 몸소라 할 수 있을까. (그 체험교실은 영아 대상은 아니었다. 그리고 영아 손 근육 활동에서도 손 근육을 쓰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대상의 질감도 중요하게 고려된다.) 게다가 파편들은 크고, 이미 형태가 완성된 틀이 있으니 평면의 퍼즐 맞추기보다 더 쉬웠다. 평면의 퍼즐 맞추기가 조각조각이 이어지면서 그림이 완성되는 과정을 즐기는 것이라면, 토기의 형태를 갖춘 틀에 파편 조각을 붙여가는 것은 과정을 즐기기에는 단순했다. 이러한 방식의 조립 용품 세트로 전개되는 체험 교육의 예는 무수히 많다. 수많은 축제의 체험 부스에 마련된 탈 만들기 체험은 이미 거의 완성된 탈에 채색하는 과정만을 남겨둔 경우들이 대부분이다. 종이 탈 만들기의 과정에서 종이의 물성을 직접 제 몸으로 겪으면서 형태를 만드는 과정은, 체험 교구 회사들의 대량생산 체계가 떠맡고 있는 것이다.

 

 다른 예. 꿈다락 토요문화학교에서 참관하게 된 미술교육 프로그램. 미술사 강의와 작품 활동을 결합한 기획안이 흥미로웠다. 특히 미술사를 매체의 변화를 중심으로 구성한 커리큘럼이 주목되는 프로그램이었다. 내가 참관한 수업은 프레스코화에 대한 수업이었다. 프레스코화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대표작들을 보여주고 이어서 프레스코화를 그리는 것으로 진행되었다. ‘직접프레스코화를 그리는과정이라는 것이 이미 준비한 재료들에 그림 그리기였다. 선생님은 프로그램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는데, 미리 반죽과 판을 준비해왔고, 작은 판에 반죽을 발라 아이들에게 작은 벽처럼 보이는 것을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판을 받은 아이들은 그 위에 그림을 그렸다. 물론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는 것과는 다른 점들이 있었겠지만, 그 다름은 이색체험에 머물렀다. 종이와 반죽의 특징은 무엇인지, 그 때문에 색감이나 표현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그 다름이 새로운 시도나 표현으로 어떻게 이어지는지에 대한 사유의 과정은 없었다. 정해진 시간 동안 분방한 그리기는 도화지에 그리기나 마찬가지로 진행되었고, 아이들은 완성한 그림판을 들고 귀가했다. 수업이 끝난 후 선생님과의 인터뷰에서 아이들이 매체의 특징을 몸소 겪어서이해하려면 어떤 재료들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반죽이 만들어지는지 직접 몸으로 만들어보는 과정이 필요하지는 않은지, 판에 반죽을 바르는 과정이라도 아이들이 직접 해보는 것은 어떨지, 매체의 특성과 표현을 탐구해볼 수 있는 과정을 만들 수는 없을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선생님의 이야기는,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이 원하는 주어진 시간에 아이들이 완성된 작품을 만들 수 있도록 수업을 구성하다 보니 그런 과정들은 생략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도리어 수업을 이렇게 진행해야 교구를 성실하게 준비하는 것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는 지적도 있었다.

 

 이러한 방식의 체험 교육에서 생략되는 것은 결국 감각이다. 예로든 빗살무늬 토기 퍼즐 맞추기는, 전시 관람보다도 더 관찰과 감각을 삭제해버린다. 전시 관람에서는 토기라는 물성에 대한 관찰, 비록 촉각을 사용하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시각을 통해서도 거친 표면 등등의 물성을 감각할 수 있다면, 플라스틱 조각들을 붙이는 체험 활동에서는 토기라는 물성에 대한 관찰과 감각의 기회마저 차단당하고 마는 것이다. 게다가 이미 토기의 형태가 완성된 틀로 주어져 있으니 토기의 형태에 대한 관찰마저도 제거된다. 프레스코화 수업 역시 마찬가지다. 선생님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 마련한 반죽과 잘 발라진 판을 제공하는 것은 직접 몸으로감각해야 할 체험의 과정을 선생님의 수업 준비 과정으로 옮겨놓고 있는 것이다.

 

 체험이 직접 몸을 움직여 다양한 감각을 활용한 교육 활동이라면 우리가 종종 만나게 되는 체험 활동은 일상의 보다도 더 협소한 감각만을 요구할 뿐이며, 과정의 단순함은 결국 겪음의 내용마저도 협소하게 하고 만다. 이러한 상황들은 체험의 본래 의미를 왜곡하고, 교육의 과정과 목표를 왜곡한다. 직접 몸으로 겪는다는 것은 키트의 조립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직접 몸으로 겪는다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감각들을 일깨우고 그러한 감각들을 통해 일상에서 간과했던 새로운 진실을 발견하는 것이 아닌가.

 

 

창의성과 갈등

 

 또 다른 예. 초등학생 대상의 연극 수업이었다. 젊은 선생님들이 그룹으로 진행하는 수업이었는데, 각각의 역할을 나누고 과정을 세세하게 준비해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내가 참관한 수업은 어떤 상황이 제시되고 범인을 추리하는 것으로 진행되었다. 아이들은 그룹으로 나뉘어 자기가 속한 팀원들과 함께 단서를 찾고 그것을 근거로 범인을 추리해 가는 것이었다. 단서 찾기와 추리는 관찰과 논리가 중요하다. 선생님들은 단서를 발견하기 위해 어떻게 관찰할 것인가의 방법론을 역할 놀이 속에서 진행하고 있었다. 너무 감추어져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드러나 있지도 않은 단서들이 추리라는 형식 속에서 논리적으로 구성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흥미롭게 진행했다. 이제 추리의 마지막 단계에 왔을 때, 한 그룹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그룹의 리더를 뽑아야 하는데, 여학생이 그 역할을 맡자 그 팀에 속한 남학생이 수업을 거부한 것이다. 물론 이런 사정은 수업이 끝난 후 전해들은 것인데, 갑자기 한 남학생이 그룹에서 나와 진행을 보조하던 선생님과 수업이 끝날 때까지 내내 대화를 하다가 추리가 모두 끝난 놀이 시간에야 수업에 합류했다. 수업이 진행되는 한편에서 보조 선생님은 그 남학생과 대화를 하면서 그러한 행동이 왜 올바르지 않은지, 특히 여자, 남자 성 역할의 편견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고 한다.

 

 비단 이 수업에서만이 아니라 그룹 활동에서 자기주장을 강하게 펴서 진행을 어렵게 한다든가 혹은 그룹 활동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지 못해 소극적이 되는 학생들을 어렵지 않게 만나게 된다. 내가 지켜봤던 수업들에서 선생님들은 그런 상황이 발생할 때 수업 진행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별도의 장소에서 아이와 대화를 나누는 방식을 택했다. 내가 직접 대화를 들은 것은 아니지만, 대화 후 아이의 행동을 보면 좋은 대화였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아쉬운 점은 과연 이것이 갈등에 대한 적절한 교육일까 라는 의문 때문이다. 특히 연극교육의 과정에서 이러한 장면을 목격할 때면 왜 이 교실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갈등은 현명한 선생님의 개입으로 해소되어야 할까. 실재의 갈등은 해소된 채, 프로그램으로 짜인 가상의 갈등만을 교육할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연극 교과서의 첫 페이지에는 연극은 갈등이라고 쓰여 있다. 종종 많은 연극 교육 전문가들은 기존의 완성된 희곡을 재현하는 것이 창의적 교육이 아니라는 비판을 한다. 주체적이고 자발적인 교육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스스로, 자신의 삶을 토대로 장면을 만들고 이야기를 짜보라고 권한다. 물론 그런 활동과 교육의 장점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수많은 사례가 있다. 그러나 성공적 사례로 언급되는 그런 수업들을 볼 때, 혹은 발표를 볼 때, 연극 교육은 자기표현의 해방감을 주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이러한 의문은 토론 연극의 과정에서 종종 마주치게 되는데, 제시되는 갈등의 상황에 대한 관객들의 개입은 대체로 봉합이거나 화해인 경우들이 적지 않다. 물론 이것은 관객들의 문제가 아니라 문제적 상황의 제기, 개입을 이끌어가는 토론 연극 사회자의 역할 등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화해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문제는 갈등이 회피된다는 것이다.

 

 물론 연극이라는 표현의 형식이 주는 해방감이나 자기발견이 소중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좋은 희곡은 그것이 고전이라든가 작가의 권위 때문에 좋은 희곡인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세상에서 겪는 갈등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죽음과 같은 파국적 상황에 이르더라도 회피하지 않고 갈등을 대면하는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는 인간에 대한, 삶에 대한 이해를 진전시키게 되는 것이다. 창의성이 기발한 아이디어가 아닌 삶에 대한 성찰이라 할 때, 연극 교육은, 그것이 직접 창작하는 것이든 감상하는 것이든, 어떻게 갈등을 대면할 것인가에 그 목표가 놓여야 하는 것이 아닐까.

 

 

체험과 경험

 

 최근 있었던 문화예술교육 정책토론회의 중요한 화두가 양적 성장에서 질적 성장으로였다고 한다. 물론 이 캐치프레이즈는 이번에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니다. 연속토론회에서 많은 발제자나 토론자가 지적하고 있는 것은 문화예술교육의 에 대한 담론 부재였다. 즉 문화예술교육의 에 대한 논의가 더 많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지봄봄이 제안하는 체험에서 경험으로 역시 이러한 지적과 잇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논의를 몸소 겪음의 의미, ‘몸소 겪음의 교육적 목표와 과정에 관한 이야기로 풀어가고자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 글은 직접 몸으로 겪는다는 것의 의미에 대한, 그 과정과 목표에 대한 분석과 비평이다. 담론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커지고 있는 만큼 정의를 넘어 실제 문화예술교육현장에서 더 많은 분석과 비평이 다투어 제시되길 바란다.

지지봄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