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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호 곁봄 | 칼럼
아이들이 스스로 걷도록 하자
하정호 / 청소년플랫폼 마당집 마당쇠(대표)

 

  1818년의 일이다. 네덜란드어를 전혀 모르는 프랑스인 조제프 자코토는 루뱅 대학에서 불문학을 가르쳐야 했다. 때마침 출간된 프랑스어-네덜란드어 대역본이, 어찌할지 고민하던 그의 눈에 띄었다. 첫 시간. 조제프 자코토는 그 책을 학생들에게 건네주었다. 그러면서 네덜란드어 번역문과 대비해 가면서 프랑스어를 익히라고 학생들에게 말했다. 물론 네덜란드 말을 모르니 그 말도 통역이 대신해야 했다. 1장의 절반 정도를 본 뒤에 익힌 것을 쉼 없이 되풀이하고, 아직 외우지 못한 부분은 수업시간에 얘기할 수 있을 정도로만 읽으라고 말했다. 학생들과 다시 만난 날, 이번에는 학생들에게 자기가 읽은 것에 대해 어떤 생각이 드는지 써보라고 시켰다. 그것도 프랑스어로. 단지 임시변통으로 한 일이었기에,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한 학생들이 그 일을 해낼 것이라고는 자코토도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아무것도 가르친 것이 없었지만 학생들은 동사 변화의 규칙을 스스로 알아내고 프랑스어 문장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책을 읽어가면서 학생들은 초등학생 수준이 아닌 작가 수준으로 글을 써냈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첫 대목에 나오는 일화다. 랑시에르는 이 일화를 통해 참된 가르침이 어떠해야 하는지 논파한다. 우리는 흔히 교사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학생들에게 설명하고, 학생들은 교사의 그런 설명을 들으면서 모르던 것을 이해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해서 학생들의 수준을 자기 수준만큼 차츰 끌어올리는 게 교사의 역할이라고 믿는다. 교사가 프랑스어를 가르친다면, 프랑스어 문법과 철자법을 체계적으로 연구해서 쉬운 것부터 하나씩 학생들에게 설명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학생들이 쓸데없는 데서 헤매지 않고 단계를 밟아 쉽게 습득하도록 잘 설명해주는 교사가 좋은 교사로 평가된다. 하지만 랑시에르는 그런 식의 교수-학습법이 바보 만들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우선 이런 생각은 학생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라고 전제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숱한 반복과 실패를 거듭하면서 스스로 말(모국어)을 배웠다. 기억하지도 못하는 시절의 얘기지만, 우리는 그때 문법을 가르쳐주는 교사가 필요치 않았다. 우리 모두는 배울 수 있는 대단한 능력을 타고 났지만, 일단 학교에 입학하고 나면 그런 능력들이 아무 쓸모없는 것처럼 버려지게 된다. 교사들은 또 어떤가? 여기 프랑스 동화책이 한 권 있다고 치자. 이 책을 학생들에게 읽히려면 무엇부터 해야 할까? 일단 동화책은 던져두고 프랑스어 문법책부터 공부해야 한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 문법책이 어려우면 그것을 설명하는 또 다른 책을 더 읽어야 할 수도 있다. 그러는 사이에 학생들은 여전히 바보로 머물러 있고, 교사들은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 되어간다. 그렇게 공부에 공부를 거듭해서 대학교 불문학과를 나오고 나면, 그제야 학생들에게 동화책 한 권을 읽어줄 수 있다. 하지만 교사들이 하고 있는 그 일을 왜 학생들이 직접 하게 내버려두면 안 되는 걸까?

 

이미 우리나라의 학교는 학생들을 한입 가득 머금고 있다가 밤늦게 토해내고 다시 이른 아침에 잡아먹는 공룡이 된 지 수십 년째다. 학교를 마치면 다들 학원으로 몰려가 사교육비가 늘어나니, 정부는 아예 방과후 학교라는 이름으로 학생들을 붙들어 매었다. 초등학생들은 돌봄 교실에서 부모님의 퇴근을 기다린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은 이런저런 프로그램의 대상이 되어 종일토록 선생님들과 대면해야 한다. 마음껏 놀면서 친구를 사귈 수도 없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방과후 수업에서, 돌봄 교실에서, 학원에서, 각종 공모사업에서도 정형화된 바코드 인간으로 자라나며 정서장애와 스트레스가 심해진다. 이들 프로그램이 체험과 참여 위주로 구성된다고는 하지만 서로를 모방하는 과정에서 여기저기 유사한 프로그램들만 늘어나고, 아이들은 부모가 쇼핑해 오는 프로그램을 소비하며 창의성을 잃어가고 있다. 각종 복지사업들이 중복되는 저소득층 아동들은 문제가 더 심각하다. 왕따의 이면에는 친구를 빼앗은 어른들의 과도한 욕심이 도사리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쯤 되면 이런 일들이 정말 아이들을 위한 일인지, 어른의 일자리를 위한 일은 아닌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국가의 행정은 마을의 자조모임이나 단체를 지원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 힘을 갉아먹는다. 문화예술단체들이 각종 공모사업에 의존하게 되면 단순한 체험 프로그램만 반복하면서 그 역량이 약화될 수 있다. 각종 공모사업 계획서에는 늘 지난 2~3년간의 공모사업실적을 써넣으라고 하는데, 이런 조건이 자력으로 어렵게 버텨가던 단체들을 자괴감에 빠지게 하고, 다른 단체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공모사업에 뛰어들도록 만든다. 사교육을 줄이겠다고 방과후 교실을 늘린 결과 학원들이 없어져, 깊이 있는 교육을 받고 싶은 학생들이 찾아갈 곳이 없어졌다. 공모사업에 선정된 주민들은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정산하느라 정작 여유 있게 아이들을 돌볼 시간이 없어진다. 전국의 많은 청소년수련시설들이 자유학기제나 방과후 아카데미 같은 정부 시책을 진행하느라 정작 청소년 동아리들을 활성화시키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우리가 정말 염려해야 할 일은 프로그램 지원이 아니라, 아이들이 온갖 프로그램의 대상으로 전락해 자발성을 잃어가는 문제이다.


잘못된 길도 오래 걸으면 되돌아가기가 주저된다. 지금 우리 교육의 모습이 그러하다. 바른 교육이 가능하려면 우선 아이들을 프로그램의 대상으로 묶어두는 일부터 줄여가야 한다. 대부분의 공모사업은 예산 지원을 받기 위해 사전에 사업계획서를 내고, 그 계획대로 진행하였는지 각종 증빙을 제출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프로그램대로 운영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어 아이들이 수동적인 객체로 머무르고 마는 일이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다. 수업과 관련되지 않은 다른 행동은 못하게 막으면서 진도를 빼야 하는 제도교육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아이들이 프로그램의 노예로 자라지 않게 하려면, 마을마다 아이들이 자유롭게 숨 쉴 수 있는 거점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무엇을 배우기 위해서 가는 곳이 아니라, 즐겁게 친구를 사귀기 위해 가는 곳. 그곳에서 한두 시간 이런저런 프로그램이 운영되더라도, 그것 때문에 가는 것은 아닌 곳. 그런 곳이 아이들에게도 있어야 하지 않겠나. 일본 가와사키시의 아동인권조례는 어린이와 청소년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인 것, 휴식하여 자신을 되찾는 것, 자유롭게 놀고 활동하는 것, 안심하고 인간관계를 만드는 것들이 가능한 거점을 시에서 제공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마을에서 돌봄이나 교육이 필요하다면, 학교 밖에 또 다른 학교를 만들어 아이들을 가두어 두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들이 원하는 활동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만드는 일을 우리가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휴식하면서 자신을 되찾는 것은 우리 아이들에게도 절실하게 필요하다. 교육은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아이들은 놀면서도 늘 새로운 것을 배우려 한다. 이 배움의 욕구가 원초적인 자생력의 바탕이다. 배움의 의지가 없는 곳에서는 어떠한 창조 활동도 일어날 수가 없다. 무언가를 가르치겠다는 사람들이, 아이들이 본래 가지고 있던 배움의 욕구조차 빼앗는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 신가동 재개발지역에 조그만 집을 얻어 마당집을 만든 것도 그 때문이다. ‘마당집은 아이들이 마음껏 놀다 지치면 들어와 책을 읽으면 좋겠다 싶어 만든 공간이다. 아이들이 넘나들 수 있도록 대문을 뜯고 담장을 낮추는 일부터 시작했다. 담장에 그림을 그리고 책장을 만드는 등의 모든 일들을 아이들과 함께 했다. 초등학교를 마친 아이들이 매일 좁은 집에서 붐볐다. 다음 해에는 농협창고를 얻어 아이들의 쉼터로 바꾸어냈다. 물청소를 하고, 벽에 페인트를 칠하고, 타일로 모자이크를 만들고, 미끄럼틀을 만드는 모든 일을 동네 아이들과 함께 했다. 아이들은 수레를 타고 놀다가도 페인트를 칠하겠다고 달려들었고, 손에 본드를 묻혀가며 타일 붙이기를 좋아했다. 지금도 매일 예술창고를 들락거리며 아이들이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

 

  다시 자크 랑시에르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섣불리 무언가를 설명하려 들면서 아이들을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바보로 만든다. “설명자에게 무능력자가 필요한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즉 설명자가 무능한 자를 그런 식으로 구성하는 것이다.” 교사가 학생을 자신의 지식 안에 가두어두려 할 때 바보 만들기가 시작된다. 교사는 자신이 아니라 세상이나 책에서 학생들 스스로 지식을 구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스승이란 구하는 자가 그의 길을 계속 가도록 유지하는 자이다. 그 길에서 구하는 자는 혼자 구해야 하며 구하기를 멈추어서는 안 된다.” 일찍이 칸트도 스스로 책임져야 할 미성년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계몽이라 말했다. 교육의 목적은 사람들이 더 이상 남들에게 배우지 않아도 되는 것을 알며 자신의 힘을 깨닫게 하는 데 있다. 다른 사람의 도움에 기대어 스스로 판단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은 여전히 미성년상태에 머문 사람이다. 당장은 제대로 걷지 못하고 쓰러져 다치더라도 걸음마를 내딛게 하는 용기가 이제 필요하다. 자발성은 신뢰로부터 나온다. 우리는 아이들이 두려움을 떨쳐낼 수 있도록 그들을 먼저 믿어야 한다. 신뢰 없이는 어떠한 배움도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지지봄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