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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오기 : 마을에서의 '경험교육'이 가능하려면,

 

- 고영직 : 김수영 시인은 시인의 역할은 새로운 시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예술교육 현장에서 강사든 어떤 형태이던 간에 기본적으로 새로운 예술교육을 발견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마을에서의 어떤 예술교육을 한다는 것은 문화교육이던 예술교육이던 명칭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을에서 활동하는 것이 마을의 새로운 사람을 발견하고, 어떻게 일터 삶터의 분리를 넘어서 새로운 삶터의 공간을 어떻게 재미있는 놀이의 공간으로 만들고.. 그런 역할이 필요한것 아닌가. 그런 개별적 노력을 통해 고유한 사례를 만드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고 본다. 누구도 함부로 훼손할수 없고 훼손되지도 않는 그런 과정을 통해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할 수 있고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를 어떻게 나만이 아니라 사회로 확장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더 필요하지 않나. 그럴려면 정치학적 고민도 필요할것 같고. ‘나홀로 볼링’이라는 책이 있다. 외국에서 볼링치는 인구는 급증했는데 지역에서 볼링치는 사회적 커뮤니티는 붕괴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문화예술에서 모두가 함께 볼링을 칠수는 없는지, 이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교육의 역할이 아닐까. 큰 기대는 갖지는 않지만 희망은 가지고 있다. 예술교육이 뭔가 할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은 하고 있다.

 

- 강원재 : 경험에 대한 이야기. 경험 학습에 대한 이야기를 이번 지지봄봄의 주요한 방향으로 이야기를 가져가보자라고 했던 맥락이 그런 맥락인것 같다. 결국 경험이라는것은 개인의 존재가 드러나야 가능한것이고 거기서 출발을 해야 하는 것이고, 작은것에 대한 발견으로부터 그것을 내 삶과 이어내는과정들이다. 그것이 내 삶과 연결되었을때 내 주위와의 관계에 대한 문제로 확장할수 있다. 그렇게 확장하는것. 확장을 통해 실천하는 문제. 습득하고 섭렵하는 단계로 까지 가고나면 되돌아와서 지금 있는 그 상황을 다시 들여다보고 새로운 발견을 하고 새로운 이음으로 가는 문제. 이것이 총체적으로 사이클을 이루는 경험에 대한 학습이다. 이게 결국 생산하는 문제와 소통하는 문제와 공유하는 문제와 이런 것이 다 같이 갈 수 밖에 없는 과정이 될 것이다. 그것을 사람이 결국 다룰 수 있는 장소의 최소한의 범위가 어디일 것인가. 총체적 경험으로서 일어나도록 하는 최소한의 범위가 어디일것이냐 했을때, 학교처럼 짜여져 있는 공간에서는 일어날 수 없고 결핍이 생기는 것이다. 박물관이던 미술관이던 다른 공간도 마찬가지이다. 총체적으로 경험을 하기에는 결핍되고 단절된 공간이기때문이다. 그렇다면 총체적 경험이 일어나기 위한 최소한의 단위는 마을일수밖에 없다.  일과 배움, 놀이가 있는 마을일수밖에 없다. 마을 안에서 문화예술교육은 경험 교육으로서 가능해지지 않는 것인가.

 

- 드라마고 : 말씀하시고 싶은 것에서 첨언하고 싶은 것이 있다. 존재 이야기를 한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여기 있는 사람들의 존재인것 같다. 두번째는 삶터와 일터의 일치 이전에 내 삶과 일터의 문화를 봐야 한다. 내 작업장에서 존재적으로 전면적이거나 새로워지고 있느냐.. 이런 고민이 없으면 이것은 마을로 이전할 수 없다. 사실은 계속 되는 공회전의문제가 여기 있다. 개인으로부터 존재가 정리된것 같은데 그 다음 문제는 존재와 나, 나와 소통하는자, 나와 생활하는 자로 확장해야 한다. 내가 일하는 방식, 이런 식으로 영역의 확장이라고 한다면 그것도 순서가 있을것 같다.

 

- 박형주 : 비슷한 지점에서 이야기를 하는데 층위가 다르다보니 이야기가 한번 공회전 된 느낌이 든다. 고영직선생님이 말씀하신 것도 공동체라는 것이 지금의 공동체가 너무 현실의 결핍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가 공동체를 이상처럼 노래하는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왜 없어진지에 대해 보지 않고 너무 이상화된 공동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문제일수도 있다. 그런 지점에서 보면 실제 결핍에서 출발하는 지점. 결핍이 대상화 학습자의 결핍이 아니라 사실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나의 문제이기도 하고, 결국 같은 문제에서 내가 같이 겪고 있을수 있는 문제일수도 있다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전체를 고민하지 않고 프로그램으로서 문화예술교육을 한다고 했을때. 우리가 말하는 공동체, 공동체 문화예술교육이라고 하는것이 계속 쳇바퀴를 돌수밖에 없을수 있다. 그런 식의 고민을 다시 시작해봐야 한다는 것이 첫 방담회의 발문이고 답은 모든 장소마다 출발은 달라질것 같은데 출발을 하는 시점에 문제의식을 반추해보며 가보자 라는 것이 이번 방담회의 마무리가 아닐까 싶다. <끝>

 

 

 

- 방담회 순서

#0. 프롤로그 : 마을에서의 교육을 사유하다  [Click!]

#1. 마을에서 문화예술교육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Click!]

#2. 삶의 기술을 담은 문화예술교육 '장소'로서의 마을에 대해 생각한다 [Click!]

#3. 나오기 : 마을에서의 '경험교육'이 가능하려면, [Click!]

 

 

 

 

 

 

경기문화예술교육 웹진 지지봄봄 http://www.gbom.net/

 

 

지지봄봄

 

 

 

 

#2. 삶의 기술을 담은 문화예술교육 '장소'로서의 마을에 대해 생각한다

 

 

- 박형주 : 정리를 해보면, 공간과 장소는 다른것. 일터와 삶터가 분리되는.. 자는 공간인것이지 이곳이 내 추억과 향기가 쌓여 장소가 기억이 되고, 혹시나 내가 여길 떠난다 하더라도 기억이 활력이 되는 것이 있을텐데 그런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계속 현장을 돌아다녀보면,  어떤 공간이던 그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 대부분 활동을 하는 공간으로 있는것이지, 그 안에서의 이야기는 형식적 이야기가 오간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그림을 그리고 연극을 한다는 활동을 하지만 생활적인 이야기는 시시껄렁한 잡다한 이야기를 나누고 끝나지 않나. 그런데, 그 이야기를 어떻게 자기가 앓고 있는 문제, 느꼈던 감명받았던 이야기들이 이 안에서 술자리처럼 쉽게 나올수 있게 유도를 할것이냐, 이곳을 어떻게 그런 장소로 탈바꿈해줄것이냐 라는 고민이 더 필요한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 강원재 : 맞다. 교육이라고 이야기할때 학교교육도 마을 안에서 학교라는 것이 필요했던 것이고 그래서 마을 안에 학교를 짓고 교육이 일어난건데, 그런데 마을에서의 학교는 분리된 공간이 되어버렸다. 공부하는 공간조차도 분리되어 버렸고. 문화공간이라고 하는 곳도 마을 안에서 문화공간이 필요했는데 문화예술이 삶과 분리되니.. 일터와 시장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공간이 공간의 역할과 패쇄성을 가지며 삶으로부터 분리된 것이다. 온갖 것이 다 분리되어버린 삶의 파편화들. 이게 지금 상황에서의 어려운 문제들이 되어있는것이다.

 

- 고영직 : 나도 그런 경험이 있다. 시골 초등학교에 갔더니 폐교가 되었다. 자기가 다녔던 학교가 폐교되었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그런 슬픔을 안다. 학교와 마을 자체가 분리되고 방금이야기하신 것 처럼 교육 자체에 어찌보면 새로운 교육에 대해 생각한다는것은 지금 시대에서는 교육의 불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으면 새로운교육을 생각할수 없는 시대가 되어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학교와 마을이 분리가 되며 스스로 구현할 수 있는 삶의 기술을 잃어버렸다는 것이 가장 큰것 같다. 내가 어릴때만 하더라도 셋째 형이 동생 책상하나 마련해준다고 사과궤짝 뜯어서 책상을 만들어줬다. 그때 되게 기뻤던 기억이 있다. 그게 셋째 형이 보여줬던 삶의 기술을 보여준것이다. 예술교육에서 기능교육이 불필요한건 아니지 않나. 그런 삶의 기술을. 자기가 익히고 있는 기술이 단순한 생존을 넘어서 생명을 가진 인간으로 성장하고 자기 이웃을 생각 할 수 있는 가슴을 갖게 하느냐에 있는 것인데, 그 자체가 분리되었다. 교과과정 개편과도 맞물려 있는듯하다. 


 미국의 사울 알린스키라는 주민운동하는 아주 탁월한 사람 있는데, 그런 사람들이 흑인과 관계를 맺고 주민운동을 하며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는 결코 가르치지 않는다. 같이 사는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 예술교육 현장에 있는 사람이나 행정 또한 그런 식으로 변화해야 하지 않는가. 무엇을 가르친게 아니다. 그런 어떤 것이 되어야 그 이야기가 결국 이반일리츠가 이야기하는.. 가난한 사람을 위해 뭘 하려고 하지 말고 옆에 있어라 하는 태도. 그런 태도가 마을에서의 예술교육이 가능한 기본적인 것 아닐까. 그게 깨지면 다 깨지는것이다.

 

 

 

- 강원재 : 교육의 불가능성은 분명할것 같고, 점점 그 부분이 명확해지는듯하다. 그러면 대안이 무엇인가 하고 물을때 이렇게 생각을 바꿔보면 뭔가 보이는것 같다. 교육이라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교육이 필요하다는것을 안다. (이것 역시도 삶의 역설이고 모순이지만) 그럴때 교육이라는 것을 학습자가 스스로 주도하도록 하는 것으로 바라보자. 이러면 교사의 역할이 달라질 것이고, 우리가 교육이라고 이야기 할때 현재의 거부감도 사라지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은 든다. 지금은 교육이라는걸 사람들의 삶(삶의 고민과 문제)이라는 것이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학습자가 스스로 주도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의 고민과 동기로부터 출발할수밖에 없다. 그럴때 한사람 한사람의 학습자가 자신의 문제와 고민으로부터 그것을 배우고자 하는 방식으로 활동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일어날때 교사가 역할을 하는 방식을 생각해본다. 앞으로 문화예술교육은 이렇게 작동하도록 만들어가야 하지 않는가.

 

- 드라마고 : 존재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것 같다. 사람이던 선생님이던. 지금 이야기의 전제를 형성해야 할것 같다. 존재가 중요하다. 사람, 선생님이던 그 존재가 규명되어야 한다. 문화예술교육 현장에서는 강사를 만나긴 하지만 저사람이 누군지 모른다. 현실에 대한 대안을 마련하더라도 존재를 인식해야 한다.

 

- 박형주 : 자연스럽게 관계의 이야기가 학교와 사회의 이야기로 넘어갔다. 문화예술교육의 출발 자체도 지역과 장소 기반 프로그램이었다. 어느순간 사회문화예술교육이라는 타이틀로 정리가되며 공간으로 들어가는 프로그램으로 세팅이 되고 규격화된 활동으로변했다. 그렇다보니 생산적 대화가 이루어지는 공간이 아니라 무언가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으로 점점 변하고 있다. 이런 형태로는 아무리 문화예술교육이란 형태로 마을만들기 안에 들어가도 결국 허상일수밖에 없다. 오늘은 학교까지 가기엔 길고, 그렇다면 초반에 그렇게 시작했던 것이 규범화 되며 점점 하나의 틀이 정해지긴 했는데 이게 어떻게 다시금 장소기반. 또는  지역 마을 안에서 학교와 연동된 문화예술교육이 가능할 것이냐. 이런 부분을 생각할때 하나의 힌트가 존재인것 같다. 또 하나는 교육과 배움의 문제인듯 하다. 배움은 교육이 전제되지 않다하더라도 일어날수 있는데 배움이 전제되지 않은 교육은 어려운것 아닌가. 그런 형태를 만들기 위한 대안 혹은 단계별로 필요한 작업은 어떤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면 좋겠다.

 

- 드라마고 : 한 인간은 스스로 살고자 한다. 스스로 자기를 형성하고자 하고 잠재적으로 본질적으로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주변에 존재하는 환경을 통해 자기가 필요한 학습이나 관계, 상호작용 등을 스스로 탐구하려고 한다. ‘그’가 ‘그’로써 살아가기 위한 교육이어야 한다.

 

- 고영직 : 윤재철 시인의 『거꾸로 가자』 시집에  「지금도 물레 돌리는 옹기장이를 보며」라는 시가 있다.

 

지금도 물레 돌리는 옹기장이를 보며(윤재철 作)

 

어릴 적은 늘
무언가를 만들며 놀던 기억
개천 얼크러진 풀섶 안
조대흙 파서
신라시대 토우 같은 인형도 만들고
비행기나 탱크 같은 전쟁의 기억도 만들었지

어릴 적은 늘
무언가를 만들었다네
자치기 깎고 새총 만들고
비석치기 돌 다듬고
밀짚 수수깡으로 여치집 만들고
관자 쪼가리 뚝딱여서
비둘기집 개집도 만들어주었지

그러나 지금은
내가 만든 기억이 없네
아무것도 만든 기억이 없네
땅도 없고 연장도 없지만
그냥 싼 돈으로 사서
모든 것 쓰고 버리기 바쁘다네
자족과 상상의 아무 기억이 없다네

 

 시의 세번째 연에서 나오는 “자족과 상상의 기억”이라는게 어쩌면 예술교육에서 지향하는 바가 아닌가한다.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생각하는 교육을 하자는 것이고. 가르치는 것이 교육이 아니라 학생이 무엇을 배울까 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교육의 방법론의 차원으로 학습자의 주도적학습을  이야기한것 같다. 이런 교육 행위가 마을에서 예술을 매개로 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 포인트인데, 마을에서 어떤 희망을 갖는다고 하는게 희망을 갖기 위해서는 마을에 관한 어떤 믿음 자체를 깨야하는 것이 아니냐.. 라는 이야기와 맞물려있는것 같다. 기존의  마을, 예술교육이 만날때.. 생각하는 막연한 것이나 기존에 클래식하게 해온 관성을 깨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 방담회 순서

#0. 프롤로그 : 마을에서의 교육을 사유하다  [Click!]

#1. 마을에서 문화예술교육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Click!]

#2. 삶의 기술을 담은 문화예술교육 '장소'로서의 마을에 대해 생각한다 [Click!]

#3. 나오기 : 마을에서의 '경험교육'이 가능하려면, [Click!]

 

 

 

 

경기문화예술교육 웹진 지지봄봄 http://www.gbom.net/

 

지지봄봄

 

 

 

 

#1. 마을에서 문화예술교육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 고영직 : 앞에 마을에서 살아가기 위한 함께 살기 위한 마을, 죽어가기 위한 마을 이 제목이 인상적이었다. 마르케스의 소설 중에 백년의 고독이라는 유명한 작품이 있다. 거기 우루술라라는 할머니가 등장하는데, 할머니가 마콘도라고 하는 가상의 마을에서 쫒겨나게 생겼는데, 이때 이 곳을 떠날수 없다고 하신다. 그때 그 할머니가 하시는 대사가 떠올랐다.  “여기서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라는 말. 누군가가 죽었더라고 하면, 그 곳을 떠날수 없는데 죽은 사람이 없기 때문에 떠날수 있다라는 거다. 누군가가 죽어서 그 땅에 묻혔다고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기억이며 압축파일처럼 우리에게 문화적으로 전승되어 나오는 힘이 거기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살기 위한 마을, 같이 살기 위한 마을은 지금 정책 사업이나 담론을 통해 많이 나오는데, 같이 죽기 위한 마을로서의 그런 이야기는 처음들어서 신선했고, 그런 점이 발제에서 재밌는 대목이었다.

 

- 강원재 :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이야기인것 같다. 우리가 사는 것은 삶에 대한 욕구도 있지만 죽음에 대한 욕구도 있고, 그것을 연장시키며 그 사이사이에서 의미있는 삶을 만들어 가는거다. 문화예술교육은 그 사이에서 그것들을 연결시키는 활동인것 같다.

 

박형주 :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들어보면 결국 마을 만들기라는것 자체가, 사람들에게 환상을 심어주는 것이다. 양질의 삶을 살아가는것에서 문화예술교육이 관계를 재구성한다거나 생산적 활동으로서의 문화예술활동이 아니라 여가적 시간을 소비하기 위한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 이 삶을 여유를 부리고 이렇게 살수 있다는 환상을 유지하게끔 가는데, 문화예술교육이 그 기능을 오히러 더 도와주고 있는것이 아닌가. 마을의 진짜 문제를 보지 못하게 떼내는 작업을 문화예술교육이 하는것 아닌가. 마을과,공동체와 문화예술교육이 어떻게 만나야 하느냐라고 물었을때, 결국 교육이 만남에서 시작을 하는 것이지 않나하는 생각을 한다. 그런 것이 지금 왜 가면 갈수록 사업이 안되어 질까하는 의문이 있다. 그렇다면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마을에서의 문화예술교육을 가야 할까 했을때 이 발제 안에 힌트들이 담겨있다고 생각을 했다. 큰 이야기는 다 나왔기 때문에 혹시 좀 더 이 부분에서 같이 이야기를 나눴으면 하는 지점이 있는지 묻고싶다.

 

 

 

- 강원재 : 마을이라는 곳에서 문화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문화예술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이런 이야기를 해보면 좋겠다. 도시마을에서의 도시에서의 문화예술과 시골, 자연이 있는 곳에서의 문화예술은 또 다른것 같다. 도시 안에서는 도시 공간 자체가 삶을 살기 위한 생산, 거래, 소비 이것이 자본주의가 짜놓은 방식이라고 하면 도시는 생산이라는 것을 할 수 없는 공간이 되어 있다. 거래와 소유밖에 없는것이다.  인간이 생산하지 않고 살수 있는가. 자기의 전인성을 획득할 수 있는가 라고 할때 불가능하다생각한다. 문화예술이 유일하게 도시에서 생산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그것은 직접 자연의 노동을 통해 거기서 생산을 일으키는것이 아닌 가생산일수도 있다. 문화예술이라는 것은 도시에서의 삶에서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할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요즘 많이 든다. 그 지점에서 문화예술교육에서 요리를 접목을 시키는데 그것도 요리하는 행위들이 비슷한게 있는것 같다. 문화예술이 생산을 담당하며 사람을 치유하고, 그 안에서 내적 충만감을 만들어가는것 만큼이나 요리에서도 그런 과정이 일어나기 때문에 교육적 과정으로 끌어온다. 그럴때 도시에서의 생산이라는 것이 없어진것이 대한 문화예술교육의 역할이 있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 고영직 : 그런 논의도 해보고, 학교와 마을의 관계 중요한것 같다. 방금 이야기 한것이 삶의 기술로서 예술교육 테마로 하나 이야기 할 수 있을것 같고. 관계의 설정을 이야기 하는데, 관계자체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면 좋겠다. 결국엔 우리가 생각하고 추구하는 공동체라고 하는게 폐쇄된 공동체가 아니라는거다. 그들만의 타워팰리스 식의 공동체가 아니라는 측면이 있는것 같다. 이런 논의를 몇개 범주를 넣어서 하면 자연스럽게 우리가 어떻게 죽기 위한 마을공동체를 만들어낼 것인가를 다시 논의할수 있을것 같다.

 

- 강원재 : 문화예술이 생산의 역할을 하는것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고영직이 이야기한것 처럼 관계와 소통의 역할을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는 짚어진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 드라마고 : 노동관계를 살펴봐야 한다. 문화예술교육이나 문화예술사업에 대한 노동관계뿐만이 아니라 문화예술활동이 마을에서 어떤 노동관계를 가져야 하는가를 생각해봐야 한다. 먹고사는 문제가 중요하고 보편적인 것이다. 강원재가 이야기 한것 중에 의미있는 측면은 도시의 노동이다 라는 측면이다. 도시의 노동이 다 종속되어 있다. 어떻게 보면 우리 세대에는 해결되지 않을 수도 있다.  

 

 산문 시 중에 이런 시가 있다. 어떤 여자분이 매일 자기가 다니는 길에 할머니가 앉아계셔서 인사를 했다. 익숙해진 후에 할머니는 매번 어디가냐고 물어보셨다. 그리고 나서 생각해보니 할머니는 매번 어디가냐고 물어보신다. 그런데 오늘은 할머니가 참 예쁘다, 젊다고 이야기 하셨다. 고맙다고 돌아섰는데 스스로 눈시울이 젖게 된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시가 있다. 이 시가 창작되는 과정. 나는 이 시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자기 일상과 생활에서 써지는 시고, 할머니가 늙어서 죽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와 인사하는 사이이자 자기에게 깨달음을 주는, 뭔가 느낌을 주는 사람이다. 그 느낌을 줬다는 것이 예쁘고 젊다는 것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인것이 아니라 할머니와 나의 인생 전체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이런 상태가 예술적으로 자유로운 상태이고 그리고 이것이 문화예술교육적으로 쓴다면 그 시를 좋아서 가져가서 쓴다는것이다. 지원을 받고,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하는 간극 사이에서 무언가 탐구가 필요하다. 내가 생각할땐 도시는 공동체에 대한 경험이 없다. 산업에 의해 만들어진 도시이고. 폐쇄적 공동체를 도시에서 구성하려고 해도 할수도 없다.  생활협동조합도 생산수단을 공유하는데서 조합이 만들어진다. 생산수단과 노동관계에서 공동체를 이야기 할수 있을 뿐이지 아직 취미하거나 수다떠는 모임을 공동체라고 하지는 않는다. 여전히 공동체는 개폐의 문제가 아니라 생산수단과 상호관계에 대한 문제가 있는거고. 예술과 생산체계에 대한 문제가 어떻게 연결되느냐를 고민해야 한다.

 

- 강원재 : 문화예술교육에 역설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드라마고 이야기를 듣다보면 더 분명해 지는것 같은데 문화예술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무목적적일때 자유로운 행위로서 예술적인 미들을 창조해내는 순간을 맞이한다. 그런데 그 목적성이라는 것이 지원금을 받는다던지 먹고살기 위해 그림을 판다던지 하며 이렇게 목적을 가지는 순간 자유로운 활동은 제약을 받는다. 예술이라는것, 문화예술교육 자체는 먹고사는 것과 자유로운 행위 사이에서 끊임없이 역설을 맞이할수밖에 없는거고 그 모순된 상반된 것 속에서 결국 중심을 잡으며 해나갈수 밖에 없는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분명해진다.

 

- 박형주 : 관계를 이야기하다보니 문화예술교육이라는 것이 단순 예술적 활동으로 동치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적 활동과 교육적 활동이 가지고 있는 또다른 한번의 과정을 고려하지 않으면 관계라는 것이 잘 안만들어 질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 강원재 : 이것은 결과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관계에 대한 문제이다. 결과적으로 평가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관계자체에서 의미가 발생하는 것이기때문이다. 우리 삶에서 관계들이 굉장히 분절화되어 있다. 특히 도시에서의 삶이라는 것은 다 분절화 되어 있는데 문화예술교육이라는 자체의 속성이 분절된 삶속에서 관계성의 의미를 발견하는 활동이기다. 그래서 분절화되어 있는 것을 상호 연결 시키고 연결된 것에서 커뮤니티성을 만들어 내고, 이후에 커뮤니티로부터 같이 살아가는 이 장소에 대한 고민을 하도록 만들어내도록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 고영직 : 스스로 살 수 있는 힘을 주게 하는것. 이게 어쩌면 본질일수 있다. 관계 또한 그것이 전제되지않은 관계가 얼마나 허약하겠나. 그것이 예술이 지향하는 목표이기도 하다. 또 교육의 지향도 사람의 변화에 있는건데. 자립할 수 있는 인간이 많아져야 마을에서 다른 사람과 자치하는것이 사는것이 가능하다. 자립에서 자치로 가는것이다. 그것을 문화예술이 프로세스적 의미의 과정이 아니라 수행적 과정으로 수행해 나가는게 예술교육의 큰 역할인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그것이 안되는 이유는 마을에서 더불어 뿌리내리고 살수 있는 인간이 적어져 없기때문이다. 정주성. 반지하도 10몇년동안 하다가 이사갈수밖에 없고 경험이 휘발되는 것이 아닌가. 소중한 경험들이 휘발되는 양상들이 어찌보면 안타깝기도 하다. 어떤 생태학자가 멋진 슬로건을 이야기 하던데, ‘나는 장소이다’ 라는 것이었다. 마을에서의 예술교육을 진행하고 어쩌면 그런 것을 해나가는 방식이 나는 장소이다라는 것을 자기 몸과 마음속에 구현 내는 것이다.  누군가를 위해 뭔가 한다는 생각을 버리는것이 필요한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자본화되며 일터와 삶터가 분리되어 있고. 일터는 철저하게 자본의 논리로 작동되고 그나마 좀 남아있는 것이 삶터인데, 삶터자체. 민주주의는 결국엔 특정한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삶터의 중요성이 있는데, 문제는 삶터를 예술교육을 통해 어떤 삶터로 만들 것인가. 추상적인 삶터가 아니라 즐겁게 놀 수 있는 놀토로만드는것이 예술교육이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식이 아닌가 생각을 해본다.

 

 

- 방담회 순서

#0. 프롤로그 : 마을에서의 교육을 사유하다  [Click!]

#1. 마을에서 문화예술교육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Click!]

#2. 삶의 기술을 담은 문화예술교육 '장소'로서의 마을에 대해 생각한다 [Click!]

#3. 나오기 : 마을에서의 '경험교육'이 가능하려면, [Click!]

 

 

 

 

경기문화예술교육 웹진 지지봄봄 http://www.gbom.net/

 

지지봄봄

 

 

 

 

 공동체의 문제를 풀어가는 창조적 해법을 마련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문화예술교육은 지금 정서적 지지의 역할, 공동의 경험을 만드는 역할, 창조적 해법을 시도하는 역할 등 다층적인 역할을 요구받고 있다. 그러다보니 지역사회에서 주체적으로 문화적 가능성을 만들어 갈 수 있도록 설계된 문화예술교육 사례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 또한 높아지는 듯하다. 문화예술교육, 특히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문화예술교육은 마을 또는 동네라고 칭하는 공동체적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로부터 출발한다. 그래서 문화예술교육은 때론 삶의 자취를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그 속에서 새로운 문화적 의미를 발견하는 일이 되기도 하고, 때론 지역의 다양한 사회문화적 현상 속에서 새로운 문화적 가치를 발견하고 숨결을 불어넣는 과정이 되기도 한다. 이런 까닭에 문화예술교육에서 가장 먼저 이야기되어야 할 것은 우리가 공간과 사람에게서 발견하게 될 그 무엇이어야 한다.

 

 역사와 기억을 마비시키는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발견해 내야 하는 그 무엇이란 바로 시간과 역사다. 공간과 사람은 함께 부대끼며 살아가며 자연스럽게 교류하기도 하고 때로는 갈등하기도 한다.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변하면서 사람들은 옛 공간을 추억하기도 하고 그리워하기도 한다. 옛 공간 속에 자신이 살아온 시간과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들은 자신의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자신들의 지나간 시간을 기억하기 위해 사연 있는 소품을 간직하고 글이나 사진으로 자신을 기록하기도 한다.

 

 

 

 

 시간을 발견한다는 것은 거창한 역사를 만들어나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삶의 궤적이 묻어 있는 개개인의 일상사를 써 내려간다는 의미이다. 결국 사람들이 스스로 주체가 되어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공간과 사물, 사람을 깊고 심심하게바라본다는 것이고, 이는 곧 삶에 대한 성찰이자 사유의 과정이 된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칫 소홀하게 지나치기 십상인 마을의 일상에 주목하도록 만드는 좋은 통로가 바로 문화예술교육이다.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해주고 마을이란 공간과 새로운 태도로 다시 만나게 해주는 힘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동체와 관련한 우리의 현실 상황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전국을 누비며 마을 살리기 활동에 전념하고 있는 ()이장의 임경수 박사의 말을 빌리자면, “도시 지역의 경우 아파트라는, 익명성을 전제로 하는 주거공간이 대부분이고, 부동산과 자녀 교육 때문에 자주 이사하면서 정체성과 공동체 의식이 약화되고, 농촌의 경우 급격한 인구 감소와 고령화로 마을이 활력을 잃으면서 공간적·정서적으로 마을 개념이 희박해지고 있다.” 이렇듯 현실 속 공동체의 모습은 서로 협력할 수 있는 정서적 기반도 부재할 뿐더러 대안적인 삶의 조건을 상상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그렇다고 아무런 실마리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에 전적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누구나 좀 더 나은 삶터에 대한 바람을 막연하게나마 가지고 있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마을에서 어떤 일을 꾀할 때 그 불만과 바람을 자연스레 드러내도록 만드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들 사이에 말길이 열려 생각이 교환되고 수렴되는 계기가 필요하다. 또 마을이란 여러 세대가 공존하는 공간이니 만큼 세대를 가로질러 관계를 맺고 공동의 경험을 일궈 낼 수 있는 회로를 다양하게 개발할 필요가 있다.

 

 앞서 잠시 언급했듯이, 성남과 같은 신도시 공간의 전형적인 문제 중 하나가 소비와 생활 편의시설만이 존재할 뿐 문화적 매커니즘이 취약하다는 것이다. 아파트들로 구획된 주거지를 벗어나면 각종 간판과 사인물로 뒤덮인 상가 건물들로 채워진, 한마디로 생활문화가 사라지고 대형 소비 시장화된 신도시 공간은 흔히 말하는 기능성 공간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생활에 있어서도 일터와 삶터가 다른 경우가 많고, 이사 등으로 인구 이동이 잦아지면서 이웃과의 교류는 물론 가족구성원간의 소통이 거의 없는 외딴 섬들이 모여 있는 섬 속 섬이 되면서 '인간관계'란 의미가 퇴색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알투스 통합예술 연구소가 분당 수내동에서 진행하고 있는 <탄천풍경 2013 - 알투스와 함께하는 천변풍경 새로 쓰기>(이하 탄천풍경’)는 관심을 두고 들여다 볼만한 프로그램이다. 소설 [천변풍경]에서 동네 아낙들의 집합소였던 청계천 빨래터처럼, 혹은 동네 아저씨들의 사교장이었던 이발소처럼, 작가의 작업실이 어떻게 사람들간의 접속과 교류를 촉진하는 미디어적 공간으로 변모해 갈지 기대하게 만드는 프로그램이기 때문이다.

 

 


 “분당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맞벌이를 하고 서울로 출퇴근을 한다. 그러나 보니 아이들이 방과 후에 늦은 시간까지 학원을 돌아다닌다. 바로 우리 작업실 옆에도 학원이 있는데, 대개 할머니들이 그 아이들을 챙겨서 데려오더라. 맞벌이하는 부모를 대신해서 방과 후에 아이들을 챙기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들이 할머니에게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는 모습을 자주 보곤 했다. 하지만 할머니들은 그 아이들의 말과 행동을 다 받아주면서 학원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데리고 가더라. 그런 상황들을 늘상 보게 되면서 아이들과 할머니들이 학원이 아닌 우리 작업실이나 탄천 같은 곳에서 함께 뭔가를 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탄천풍경’을 기획한 신을연 소장의 말이다. 

 

 이렇듯 신 소장의 문제의식에서도 드러나듯이, ‘탄천풍경’은 자신을 둘러싼 도시 환경을 예술의 눈으로 탐색하고, 단절된 세대 간의 소통을 복원할 수 있는 밑거름을 쌓음으로써 문화예술로 새로운 삶의 호흡을 전파하고자 기획되었다. 그래서 동네 할머니들과 아이들이 동네에 있는 작가의 작업실에서 한데 어울려 미술 작업도 해보고, 탄천을 거닐며 특정 장소에 스민 기억을 나누기도 하고, 그 곳에 서식하는 동물들을 살피고 쉼터를 만들기도 하고, 일상적 풍경과 사물들을 글과 그림으로 깊이 들여다보기도 하면서 공동의 경험을 차근차근 만들어 갈 계획이라고 한다. 앞으로 8개월여 동안 이러한 활동들을 펼쳐나갈 이들에게 우베 레비츠키(Uwe Lewitzky)의 다음 조언이 도움이 되길 바란다. “핵심은 사람들이 경탄할 만한 새로운 무엇인가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세상을 새로운 관점과 명확한 시각으로 돌아볼 수 있는 기회, 즉 상황을 창출해내는 것이다.”

 

 

 

알투스 '탄천풍경' 스케치 영상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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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사는 양천구가 요즘 소란스럽다. 목동 행복주택지구 지정을 철회하라는 지역 주민들의 반대 여론이 높기 때문이다. 행복주택 설명회는 파행으로 끝났고, 오목교역 주변 곳곳에 행복주택지구 지정 철회를 촉구하는 현수막들이 일제히 걸렸다. 행복주택은 철도부지와 유수지를 활용해 임대주택을 지어 시세의 50~70% 수준으로 대학생, 사회초년생, 신혼부부들에게 제공하기 위해 정부가 시행하는 사업이다. 주민들은 “사업 취지는 찬성하지만, 장소 선정을 잘못했다”고 말한다. 2800가구 규모의 행복주택이 건설되어 분양되면 그렇지 않아도 심각한 과밀학급, 교통대란, 주차대란 문제가 더 심해질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사업 추진에 반대한다. 그러나 주민들의 진짜 속내는 동네 이미지 상실과 집값 하락을 우려하는 마음의 습관이 작용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 도심마을 형태의 커뮤니티는 가능한가. 우리는 이른바 할리우드식 게이티드 커뮤니티(gated community)야말로 지상 최고의 유토피아라는 마음의 습관과 감정의 구조가 작동하는 사회에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게이티드 커뮤니티는 초고층 아파트, 타운하우스처럼 입주민 외에는 거주 구역으로 자유롭게 들어올 수 없도록 울타리를 쳐놓고 살아가는 그들만의 커뮤니티를 말한다. 그런 커뮤니티는 필시 우리 시대 인클로저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실제 목동 행복주택 예정지구에는 현대하이페리온을 비롯한 초고층 고급 아파트들이 밀집되어 있다. 아파트 인근 학교에 그곳에 거주하는 아이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당연하다. 독일 작가 크리스타 볼프가 쓴 소설 제목 『나누어진 하늘(Der geteilte Himmel)』처럼 우리는 분단된 하늘에서 살고 있다고 확언할 수 있다.

 

 

 


 우리의 마음과 문화가 두 개의 하늘로 나누어진 사회는 공유지(公有地/共有地)가 파괴된 사회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무심한 상대주의, 정신을 좀먹는 냉소주의, 전통과 인간 존엄성에 대한 경멸, 고통과 죽음에 대한 무관심을 당연시하는 감정의 구조가 작동한다.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78)에 나오는 어느 등장인물이 다음처럼 말하는 대목은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겠다. “햄릿을 읽고 모차르트를 들으며 슬픔을 교육받은 사람들이 정작 이웃집의 인간적 절망에 대해서는 눈물짓는 능력을 마비당했을지도 몰라.” 우리가 공공의 삶을 상상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미국 교육자 파커 J. 파머가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에서 낯선 사람들 사이에 사회적․정치적 연합의 유대가 가능한 자유로운 공간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파커 J. 파머는 미국 사회에서 공적인 삶이 쇠퇴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리고 그런 쇠퇴의 주된 징후로서 공공도로의 상업적인 기능이 사적으로 소유된 쇼핑몰로 대체되어왔다는 사실에서 찾는다. 왜 쇼핑몰화 현상이 문제인가. 오직 시장(영업)의 자유를 표방하는 쇼핑몰은 그곳에 누가 모일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제한하기 때문이다. “걸인과 노숙인은 들어갈 수 없고, 이러한 주변화된 사람들은 시민적 공감의 망으로부터 훨씬 멀리 밀려난다. 공공연한 정치 행위도 역시 금지되는데, 그 뒤에는 법정의 지지가 있다.”(p.175) 말 그대로 공유지의 사유화(私有化)가 철저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가 일상적으로 참여할 공적인 삶의 장소와 활력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기업형 슈퍼마켓(SSM)이 급증함에 따라 전통시장이 붕괴하고 사회적 커뮤니티가 갈수록 해체되는 우리 현실과도 오버랩된다.

 
 파커 J. 파머는 이 책에서 “민주주의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무엇이 아니라, 우리가 하고 있는 무엇이다”라고 말한다. 스스로 다스림[自治]을 구현할 줄 아는 시민들의 자발성과 역능을 그토록 역설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 책의 최대 장점은 ‘우리가 하고 있는 무엇’에 관한 다양한 사례들을 제시하는 데 있다. 청년 시절 ‘저절로 시민이 된 사람’이었던 파커 J. 파머가 1974년 남부 조지아주 흑인공동체에서 겪은 어느 교육 경험을 통해 ‘제2의 탄생’을 했다고 술회하는 대목은 퍽 인상적이다. 그는 이 교육 경험에서 ‘깨어져 희망으로 열린 마음[broken open]’을 갖는 일의 가치와 의미를 배웠다고 말한다. 그가 로버트의 규칙이라고 소개한 수업 방식은 팽팽한 대립과 난투를 피하면서 질서정연하게 집단의 의사결정을 하도록 돕는 일련의 절차이다. 일종의 협력의 의례인 셈이다. 그는 이 경험을 통해 학력은 높았지만 아는 것은 별로 없던 백인 젊은이에 불과했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고 술회한다. 그것은 자신과 다르게 사는 사람들 속으로 경계를 넘어 들어가는 타자성의 경험이었다. 그때의 강렬한 교육 경험은 이 책에서 그가 낯선 사람을 환대하고, 희망이라고 불리는 마음의 습관이 중요하다고 역설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이 책에는 시민들의 공적인 삶이 가능한 공간의 회복에 관한 다양한 사례가 등장한다. 이 중에서 도시 디자이너 마크 레이크먼의 사례는 흥미롭다. 오리건주 포틀랜드의 어느 마을에서 진행된 마크 레이크먼의 공공 프로젝트는 근린의 핵심적 교차로들을 다시 디자인하는 프로젝트였다. 그는 시민 활동가들과 함께 교차로 지역에 벤치, 대출 도서관, 24시간 찻집, 아이들의 놀이방, 지역의 정보를 제공하는 키오스크[공공장소에 설치된 매점 등의 간이 건조물] 같은 공적 시설물을 세웠다. 그후 어떻게 변했을까? 한낱 자동차 교차로에 불과했던 장소가 지역 주민들 간에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는 사회적 공간으로 변모했다. 교차로 주변에 사는 사람들의 거주 기간도 눈에 띄게 늘어났다. 파커 J. 파머는 “아무도 머물지 않던 곳을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싶은 장소로 만드는 것”(p.184)이었다고 평가한다.


 공적인 삶이 이루어지는 장소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의 공공 프로젝트는 주민의 자발적 참여는 부재하고 행․재정의 전적인 지원에 의존하는 이른바 ‘관공(官公) 프로젝트’의 형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마크 레이크먼의 프로젝트가 당국의 허가 없이 시민들의 자체적인 힘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 이론으로 사회적 네트워크의 힘과 가치를 역설하는 미국 정치학자 로버트 D. 퍼트넘의 『나홀로 볼링』은 우리가 참조해야 하는 유의미한 텍스트가 되어야 마땅하다. 나와 내 가족이 사회적 낙오자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공포의 문화로 인해 셀프 테일러리즘(self-Taylorism)이 유례없이 강화되는 우리 현실에서 환기하는 바가 퍽 크다.


 퍼트넘은 사회적 자본에는 연계형(포괄적)과 결속형(배타적)의 유형이 있다고 말한다. “결속형 사회적 자본은 일종의 사회학적 강력접착제 역할을 하고, 연계형 사회적 자본은 사회학적 윤활유 역할을 한다.”(p.27) 이런 관점에서 퍼트넘은 사회적 자본과 사회적 네트워크의 관련 양상을 정밀히 탐사하고 추적한다. 각별한 주목을 요하는 부분이 제4부 <사회적 자본의 기능>이다. 퍼트넘은 시민들이 높은 수준의 신뢰와 시민 참여를 통해 사회적 자본을 형성할 경우, 교육과 어린이의 발전은 물론이고 안전하고 유익한 동네 형성에도 큰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이른바 집합행동의 딜레마를 표현하는 죄수의 딜레마, 무임승차 문제, 공유지의 비극 같은 문제들도 사회적 자본을 구성하는 (사회적) 네트워크의 제도적 메커니즘에 의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으리라고 낙관한다.

 

 

 


 물론 세상이 저절로 아름다워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가 파울로 프레이리, 사울 D. 알린스키, 이반 일리치, 전태일 같은 공동체 조직가들의 이름을 잊어서는 안되는 여기에 있다. 그들은 혼자 살다 혼자 죽는 공유지의 비극을 온몸으로 거부했다. 그리고 사람들과 함께 ‘당신을 구할 사람은 당신뿐’이라는 가치를 지상에서 실현하고자 했다. 우리 사회에는 그런 공동체 조직가들이 절실히 필요하다. 마음과 문화가 분단된 사회에는 희망 또한 없기 때문이다. 파커 J. 파머가 왜 “자유를 지탱하는 데 습관과 마음이 법보다 더 중요하다”고 역설하는지 이해되는 대목이다. 이 말은 법과 제도의 필요성을 간과하는 언명은 아닐 것이다.


 내가 사는 양천구에서 3년째 운영하고 있는 <책읽기 모임>을 더 활성화해야겠다. 어쩌면 일상의 네트워크는 그런 소소하고 시시콜콜한 과정에서 형성되고 강화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건축가 정기용은 『사람․건축․도시』에서 “당신은 ‘대합실’에 사는가”라고 질문한다. 우리는 이 질문에 어떻게 답변해야 하는 것일까. 자신이 사는 집과 동네를 대합실로 취급하는 한, 나와 우리는 혼자 살다 혼자 죽는 무연사회를 용인하게 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우리가 집으로 곧장 가기에는 아직 이른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나와 우리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 이때 “나의 유일하고 확고한 진리는 사람에 대한 믿음이다”(사울 D. 알린스키)라는 어느 공동체 조직가의 말은 지금 이곳에서 다시 음미되어야 한다. 우리의 자산은 돈이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이다.

 

 

_ 파커 J. 파머(김찬호)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글항아리 2012)
_ 로버트 D. 퍼트넘(정승현) 『나홀로 볼링: 사회적 커뮤니티의 붕괴와 소생』(페이퍼로드 2009)
_ 사울 D. 알린스키(박순성․박지우)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아르케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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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육철학자 수호믈린스키의 『아이들에게 온 마음을』(원제 To Children I give my Heart)이라는 책을 읽었다. 아이들과의 자연 수업에서 전인교육을 실현하고자 한 수호믈린스키의 교육철학과 교육방법론을 엿볼 수 있는 책이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향유하는 기쁨을 느끼고, 지식을 아는 기쁨을 추구하며, 타자와 연대하고 나누는 것에 대한 기쁨을 표현하며 성장하는 아이들을 보며 깊은 감명을 받았다. 아이들이 쓴 시(詩)를 보며 저절로 이 땅의 척박한 (예술)교육 현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자연 앞에서 센 척하며 무례한 태도를 드러내는 반자연의 글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이 아이들이 쓴 자연의 글쓰기는 뛰어난 야생의 예술이라고 단언해도 좋다. 아이들의 시를 보며 미래의 레이첼 카슨과 알도 레오폴드의 출현을 예감하게 되는 것은 나만의 오독은 아니었으리라. 수호믈린스키는 아이들을 시인(예술가)으로 만드는 것은 자연 수업이라는 점을 확고한 교육철학과 교육방법론으로 입증해냈다. 건강 교육, 도덕 교육, 미적 교육, 지적 교육, 노동(직업) 교육, 마음(영적) 교육을 서로 분리하지 않고 하나로 통합하며 온전한 전인(全人)교육을 추구하려 한 수호믈린스키의 귀중한 교육 경험은 우리나라 교육 현장에서 더 많이 읽혀져야 마땅하다.

 

 

 

 

 미적 경험이 이루어지는 장소와 교사의 능력을 강조하는 것은 결코 지나치지 않다. 환원주의자의 과학과 결정주의자의 경제학이 지배하는 우리 현실에서 특정의 장소(place)에 확고히 뿌리를 내리고, 아이들과 함께 미적 경험을 온전히 실천하는 교사들의 존재는 귀하고 또 귀하다. 어느 시인이 “만일 내가 다시 아이를 키우게 된다면 / 아이가 많이 배우는 데 관심을 두지 않고 / 더 많이 관심을 갖게 하는 법을 일러주리라”(다이아나 루먼스)라고 한 표현은 미적 교육의 효과를 빼놓고서는 생각하기가 어렵다.


 이 점에서 2001년 문을 연 대안문화학교 안성달팽이학교(교장 이기원)는 우리의 주목에 값하는 예술교육 현장이다. 교명(校名)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달팽이학교는 디지털 문화의 상징인 골뱅이(@)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려는 교육철학과 교육방법론을 마을에서 일상적으로 구현하려는 문화예술교육 현장이다. 개교 이후 지금껏 마을 예술학교 역할을 자임한 달팽이학교의 활동은 ‘장소가 있는’ 예술교육을 추구해온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장소를 그저 바라보는 것(looking)만이 아니라, 그곳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요소들을 만나고(seeing) 이해하는데 있어서 장소성이 중요하다는 점을 자각한 것이다. 지속성의 경험이 살아 있는 서사(敍事)는 구체적인 장소성에 굳게 뿌리를 내리고 은은한 시간의 향기가 더해질 때 발효되는 것이 아니던가.

 
 학교를 시작할 때 함께한 아이들은 이제 이십대 중반 청년이 되었다. 어엿한 청년으로 성장한 몇몇 아이들은 수업 진행을 보조하고 자원봉사 역할을 자청하며 지금도 학교와 연을 맺고 있다. “어린이와 청소년 시절 어느 한때를 행복하게 보낸 아이들은 그때 그 시절을 결코 못 잊는다”는 이기원 교장의 말에 수긍하게 된다. 이곳에서 성장한 아이들이 학교로 재귀(再歸)하는 비율은 대략 30%쯤 된다고 한다. 아마도 ‘방과후 해방구’ 구실을 한 달팽이학교에서 만난 사람들과 어울려 연출한 불꽃놀이의 경험을 못 잊어서가 아닐까.

 

 

 달팽이학교에서는 다양한 예술교육이 진행되었다. 아이들은 교육과정에서 내 안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나-너의 관계의 아름다움을 연출했으며, 땅의 소리를 온몸으로 경청하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경험했다. 초봄에 논바닥에 누워 땅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가 하면, 학교 인근 금광리의 산하를 이 잡듯이 누비고 다녔으며, 장거리 자전거 투어를 하는 등 아이들의 경험을 확장하는 예술교육이 진행되었다.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성) 공부도 빼놓을 수 없다.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한 이기원 교장은 사진 수업 때에도 마을과 마을 사람과 마을의 자연에 대한 공부를 먼저 진행했다. 인문학과 생태학 그리고 예술교육 간에 통섭이 이루어지는 매개 교육을 진행한 것이다. 전시회도 열고, 사진집도 여러 권 펴냈다. 2005년부터 2007년까지 문화소외 지역 아이들과 함께한 <문화마을/문화지도 만들기> 프로젝트는 특히 애착이 가는 사업이다. 이기원 교장은 “아이들과 사진 작업을 할 때 사진 찍는 기술만을 가르치지 않았다. 사진은 마지막 공정이었다. 마을의 역사, 문화, 생활사를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올해 홍익아파트 마을 벽화 작업에서도 아이들이 그리는 벽화와 마을성의 조화에 대해 더 많이 토론하고 공부하고 있다”고 말한다. 각 마을의 특성에 맞는 마을 벽화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을(성)에 관한 공부는 아이들이 지역에 기반한 지식을 갖게 한다. 어느 아이가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던 금광 호수길도 그렇고, 들풀과 돌멩이 하나도 사진을 하고 나서부터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가왔다”고 의젓하게 말하는 것은 단적인 예가 된다. 미국 생태시인 게리 스나이더가 “자연의 다른 존재들도 그들의 문학을 갖는다”고 한 심층생태학의 웅혼한 의미를 아이들 스스로 간파한 셈이랄까. 우리는 “창조성은 그 근원을 야성(野性)에 의존하며, 야성은 자유를 부여합니다”라고 한 게리 스나이더의 말에 대해 더 깊이 음미하고 예술교육 현장에 접목해야 한다. 

 
 달팽이학교에서는 기능교육만을 고집하지 않으며, 교육 성과에도 지나치게 연연해하지 않는다. 달팽이학교의 고유한 특장(特長)은 이런 관점과 태도에서 나온다. 기능교육을 고집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아이들 스스로 보고(see), 판단하고(judge), 행동하며(act) 살아 있는 예술교육의 맥락을 느낄 줄 아는 교육예술의 경지를 추구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실제 2013년 경기문화재단 지역특성화 문화예술교육 사업으로 금광면 홍익아파트에서 진행하는 마을 벽화 프로젝트에서도 이런 원칙은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교육과정에서 시행착오를 두려워하지 않고, 교육성과에 대해 아이들에게 큰 부담을 지우려 하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래도 고민은 남는다. 표준화된 계량적 성과지표를 제시한 뒤 현장에 요구하는 정책 사업자의 클리셰한 작풍 때문이다. 새로운 평가지표의 발굴과 계발 그리고 현장과의 활발한 대화와 소통이 어느 때보다 요구되는 시점이다.

 
 마을 속 학교를 자임하는 달팽이학교는 지역에서 학교 밖 학교의 역할 또한 톡톡히 하고 있다. 도시 아이들도 그렇지만, 농촌 지역 아이들의 경우 자신이 처한 문제적 상황들 앞에서 좌절하는 아이들이 더 많다. 자신에 대한 존경심도 낮다. 이기원 교장은 지난 십수년간 학교를 운영하며 아이들이 성장하고 변화하는 과정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그래서 아이들의 성장 과정에는 어른이 필요하다는 점을 누구보다 절실히 실감한다. 두원공고 아이들과 진행하는 마을 벽화 프로젝트에서도 아이들과 자주 대화를 나누며 진로 상담을 하곤 한다. 상담이라고는 하지만, 되도록 입은 줄이고 귀를 키우려고 한다. 아이들의 멘토가 될 법한 지역 예술가들과 아이들을 매칭하는 역할도 자임한다. 아이들 부모님과도 자주 대화한다. 부모님과의 대화에서는 “아이들을 한 사람의 어른으로 대접하라”고 말한다.

 
 최근 달팽이학교는 새로운 변화를 꾀했다. 지난해 금광면에서 보개면 양복리에 소재한 지금의 플로랜드로 이사한 것이다. 예전에 한경대학교 농대 실습장으로 사용되던 곳이다. 방과후에 ‘개길’ 공간이 사라진 아이들을 생각하면 못내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그래도 달팽이학교의 교육예술은 계속된다. 아이들과 소통하는 이기원 교장의 관계적 감수성은 남다르다. “당당하고 옹골찬 달팽이학교 아이들을 보면 펄펄 힘이 난다. 이 아이들 때문에 내가 존재하는 게 아닌가.” 이기원 교장의 이런 마음은 아이들도 알아차렸을 것이다.

 

 


 

 아이들은 성장 과정에서 자신이 인정받을 수 있는 자기 공간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하다. 그런 자기 공간을 준거집단이라고 한다. 준거집단이 있는 아이들은 그곳에서 자신의 능력을 쑥쑥 펼치게 되고 행복감도 느끼게 된다. 예술교육 해방구를 꿈꾸는 달팽이학교의 새로운 변신에 주목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점차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의 향기가 더해진다면, 자석 같은 향기를 내뿜을 줄 아는 한 사람의 어른으로 탄생하지 않을까. 지금 달팽이학교에 필요한 것은 새로운 마을에서 숙성되고 발효되는 시간의 향기이다.

 

 

 

 

 

경기문화예술교육 웹진 지지봄봄 http://www.gbo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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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봄봄, 2013문화예술교육의 장소들 곁에서 미적경험의 순간을 봅니다.

 

문화예술교육현장비평을 위해 생겨난

경기문화재단 문화예술교육 웹진 지지봄봄이

2013년 첫 호를 시작합니다.

 

올해 지지봄봄은

남녀노소 다양한 주민들과 함께 문화와 예술로 만나면서

서로의 미적 취향과 관심을 소통하고

이 과정과 결과를 경험으로 공유하며

아름다운 공동되기를 실현해가는

마을, 학교, 지역아동센터, 도서관, 박물관, 미술관 등을 찾아갑니다.

 

물리적이고 행정적이고 기능적인 분류일 뿐인 지역이나 공간

문화예술교육을 통해 사람과 그들의 삶이 있는 구체적 장소로 바꿔가는

다양한 사례들 곁에서 참여자들이 맞이하는 미적경험의 순간을 기록합니다.

각각의 공간이 미적경험이 일어날 수 있는 환경인지,

가능한 조건은 무엇인지를 생각해봅니다.

 

여전히 돈 안 되는 쓸 데 없는 짓으로 치부되기 일쑤인 문화예술이

돈 되는 일을 위해, ‘쓸 데 있는 인재를 기르기 위해

학교를 짓고, 공장을 짓고, 도시를 짓는 동안

망쳐버린 이웃과 친구 간의 정, 일하고 공부하는 보람, 사람 사는 재미, 오래된 추억을

어떻게 회복하거나 새롭게 생겨나도록 하는지,

그러한 과정을 촉진하는 원인으로서의 미적경험과 환경으로서의 장소를 다뤄볼 것입니다.

 

일찍이 임마뉴엘 칸트가 지적했듯이

개념적 수사나, 맹목적 직관이 아니라

양자의 결합에서 생겨나는 인식,

바로 그 경험의 순간을 애타게 기다리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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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봄봄

 

 

 

 2013년 첫 방담회는 “마을에서의 문화예술교육”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진행이 되었습니다. 마을이라는 곳에서 문화예술의 역할과 의미를 짚어보고, 그것이 어떻게 작동 가능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았습니다. 생활협동조합 퍼포먼스 반지하의 '드라마고'씨를 중심으로, 지지봄봄 편집위원이 함께 마을과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다양한 고민을 나눈 생생한 기록, 만나보시죠!

 

좌담 :  드라마고(*닉네임, 생활협동조합 퍼포먼스 '반지하' 활동가), 고영직(문학평론가), 강원재(OO은대학연구소 1소장), 박형주(하자센터 기획부장)

 

 

 

#0. 프롤로그 : 마을에서의 교육을 사유하다 : 마을에서 살아가기 위한, 마을에서 함께 살기 위한, 마을에서 죽어가기 위한 문화예술교육

_방담회 발제문 함께 읽기

 

 

- 박형주 : 가볍게 이야기하는 자리인데 말문을 터주시라고. 먼저 드라마고가 이야기를 해주시면 자유롭게 이야기를 풀어가려고 하고 있다. 먼저 이야기를 들려주시면 좋겠다.

 

- 드라마고 : 제가 보내드린 발제문의 내용은 제목에 연결되는것 같다. 마을이란 무엇일까에 대한 막연한 질문은 아니다. 마을에서 반지하가 13년 정도 되었다. 지난 2007년부터 2012년 3월 까지는 완벽히 거주하면서 지역활동을 했는데, 주민들과 반찬도 나눠먹고 식사도 같이 하고 집도 고쳐주고, 보일러 파이프 고쳐달라고 하면 가고, 문짝 고쳐달라고 하면 가고.. 뭐 그런 행복했던 시절이었는데, 그 시절이 계속 될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것을 연속할수가 없었다. 지역에 다른 단체가 많이 들어온 데다가 관광객이 너무 많이 들어왔다. 사무실이 전면유리로 된 컨테이너 건물이었는데, 아이가 생겨서 아이가 그 공간에서 놀고 있으면, 메가폰으로 어떤 곳인지 설명을 하면서 아이가 노는 모습을 구경을 했다. 몹시 불쾌했다. 사람을 끌어드리는 사람들은 좋은 의도로 불러들인건데, 그걸 당하는 입장에서는 당하고만 있을수 없는 그런 입장의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 작년 초에 다시 옆동네로 이사를 하고, 그 동안 마을 활동을 했던 공부방아이들을 가르치거나, 주민들과 재개발 워크숍을 하거나 때론 그런 문제로 인해 재개발의 문제와 마을 문제로 10여년 동안 전국에 친구단체를 만나고 다녔던 경험이 마을에 정주하는 것이 최후라고 생각했는데, 안된거다. 삶의 정주라는 다큐멘터리까지 만들어서 극장상영까지 하면서도 그 동네를 떠날수 밖에 없었던 지금의 상황을 고민하고 정리하는 상황이다. 그런 입장에서 써졌다는 것을 알아주시면 좋겠다. (이하 발제문)

 

  한 개인은 두 부모로부터 태어난다. 오랫동안 그래왔다. 그래서 한 사람의 탄생은 인류의 씨앗들이 연속되고 있는것이다. 오랜 인류의 씨앗 속에서 태어났고 어머니의 자궁 속을 벗어났지만 그는 그의 가족과 이웃들이 속한 문화속으로 들어왔다. 막연한 독립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가 속한 문화로 들어왔다. 그 어머니가 먹는 음식이 아이에게 먹여지고, 그의 부모가 사용하는 언어로 소통하며, 그가 다니는 공간과 풍경들에 담긴 역사와 문화는 그의 삶의 환경이 된다.


  한 아이의 성장발달 과정은 신체적 성숙과 함께 인간으로서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필요한 필수한 삶의 조건을 학습하는 과정이다. 살기 위해 학습한다는 것이다. 살려고 태어났으니 아이들은 일어서려하고 말하려고 하고 관심을 가지는 것이 이쁘고 깜찍한 짓이 아니라  살기 위한 절대절명의 활동이라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직접적으로 만나는 자연, 인공의 사물을 접촉하고, 자신과 공존하는 사람들을 파악하고 교감하고, 자신의 필요와 타인과의 공존을 위해 노동하고 자신의 욕구와 자기 존재를 탐구하고 표현하는 활동은 지속되어 갈 것이다. 이게 다 절대절명으로 필요한 삶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하나의 신체를 갖고 있고, 지난 인류가 그랬든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죽게된다. 한정된 수명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신을 실현하고 사랑하며 다음의 세대를 생산하는 활동을 구성해 가고 있다. 청년들은 곧 주변의 사람들이 사라지고 새로운 새대들이 태어나는 순환의 과정을 체감할것이다. 인생은 순환되는거라는걸 느낀다는 것이다. 자신의 지나온 시절과 앞으로의 삶의 의미를 가늠하기 위한 사유에 빠져들것이다. 한없이 질주할것 같은 삶이 어느순간 순환된다는것을 느꼈을때 사유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생애는 영아기에서 아동기에 이르는 폭발적인 성장과 10대의 자기 정체성과 인간세계에 대한 탐구, 20대의 열정적인 경험과 사랑, 30대의 노동을 통한 사회활동의 점착, 40대의 양육과 부양의 중대한 의무감과 자신의 일에 대한 숙련 추구내지는 사회적 요구, 50대의 노동과 사회에 통찰과 가치있는 사회활동의 탐색을 통해 가치있는 활동을 한다. 60대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이해와 수용에 기반한 새로운 독립의 추구, 70대 이후의 삶은 삶의 의미와 가치를 정리하고 자신의 영혼을 위로하는 시기로 구성된다. 이와 같은 성장과정에서 연령대 별로 부각되고 요구되는 것이 결핍되었을때 결핍을 회복하지 않으면 다음의 생애시기에 혼돈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20대때 충분한 사랑의 경험이 없으면 30대때 혼돈이 찾아오고, 40대때 양육과 부양에 대한 의무감을 느끼지 못하면 나중엔 다음 세대가 없거나 부모와 갈등이 생길수 있고.. 마을은 일정한 문화적 영역에서 한 아이의 성장발달이 요구하는 사물과 사람과 공간과 기호들의 위치하여 전면적 성장의 환경으로 작동되어진다. 아이가 절대절명으로 살아야 하기때문에 만나는 사람, 여러가지 기호들. 기호를 언어적 측면으로 볼수도 있고, 제스춰, 문화가 만들어놓은 규칙들. 인도와 차도라던지. 그런 규칙들, 이 모든것들이 아이가 전면적 인간으로 살기 위한 행동으로 작동한다. 이것은 사회가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하고 있는 아이가 전면적으로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그 존재 자체가 전면적 성장을 위해 환경 자체를 전면적으로 만나려고 한다는 것이다. 어른들이 티비를 많이 본다고 우려한다거나, 사물을 너무 집중해서 보고 있으니 그만한다고 하는거라거나 이런식의 것들이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다.


 다만 한국의 현대사는 자본주의의 독점된 경제체제로 인해 마을에서의 노동과 문화가 파괴되고 더 많은 소득을 위해 노예들이 되어서 원거리로 이동하는 노동과 대중상품의 소비로 위로받는 삶의 방식을 대중화 시켰다. 우리 대부분 그렇다. 나도 밖에서 벌지 않으면 살수가 없다. 평범하지 않게 쇠락하는 마을과 평범하지 못해서 쇠락하는 마을이 많아졌고, 그 마을을 벗어나 비범한 소득과 소비를 이룩할 수 있는 곳으로 이주하고 싶은 욕망들이 있다. 아이들도 그렇고, 주민들이 그곳을 떠나고 싶어한다. 그런것이 어떻게 만들어지냐면, 마을과 관계를 외면한 학교교육이 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도 그렇다. 지역사회 과목이 거의 없다. 특히 지방대학이나 이런데는 더 많아야 하는데 그런게 없다. 그리고 7차 교육과정 이후에 지역사회 학습에 대한 내용이 초등학교에도 존재하긴 하지만 여전히 단절이 풀렸다고 볼수 없다. 그리고 앞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심각한 경쟁은 소수의 이익을 위해 이웃을 활용하는 추악한 정치활동으로 재생산 된다. 삶의 전면적인 전개가 이뤄지는 마을에서 이웃들의 관계는 소득을 증대하기 위한 파트너쉽과 특정 정치세력의 대리전의 비겁한 현장으로 변이되었다.

 우리의 문화활동과 문화예술교육의 활동들은 지금 이 마을을 대상으로 활동되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활동의 주체들은 기초적이고 보편적인 인간의 삶과 생애에 대한 철학, 현재의 파괴된 마을의 현실과 그 원인을 파악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조건을 성찰해 내는 활동을 구성하지 못하고 있는듯 하다.


 문화예술교육을 실행하는 주체들은 대부분 그 마을에 거주하지 않거나 그 마을의 역사와 문화의 환경을 함께 대면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거주하면 대면할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거주하지 않아도 대면하려고 하면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와 나라는 개별적인 상호작용에 집중하지 못합니다. 동네에서 길에 있는 할머니를 만날때 일대일로 만난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어디가세요?”하면 “어 안녕, 어디가.” 이런식으로 일대 일로 대면하는데, 프로그램이나 프로젝트 내지는 지원사업의 형태로 만나면 사람들을 일대일로 만나기가 힘들다. 집단과 개인이 만나게 되거나 특정한 개인을 개별적으로 보지 못하고, 특정 집단의 일부로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는 마을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이다. 준비된 프로그램은 타지의 특정한 집단이라는 규정된 정체성의 마을을 대상으로 삶의 전면성을 외면한채 특정한 즐거움이나 특정한 학습이나 특정한 행위나 특정한 이상을 여전히 미래적 가치로 포장한다. 그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현재의 삶을 나누지 못하고 이걸 배우면 즐거워진다거나 잘하게 된다는 미래적 가치로 포장시켜서 그들을 수업에 참가시키고 그것으로 성과를 가져간다는 것이다. 구체적이고 현장적이지 못한 포장된 성과로 처음부터 규정짓고 들어간다는 것이다. 왜냐면 계획서를 그렇게 짜게끔 되어져 있다. 이게 엄청 큰 문제이다.

 

 이런 일이 발생하는 조건은 마을의 노동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마을에서 일하고 마을에서 가르치며 마을에서 함께 살기를 꿈꾸지만, 이렇게 마을에서 사는 사람들은 마을에 가게를 열고 있거나 할일이 없어서 마을에 머물거나 어쩔수 없이 마을에서 아이들을 키워야 하는 부모들의 빈약한 삶의 현실로 인식되고 있다. 대부분의 문화예술교육자들은 그 마을에 살지 않으며 여러 지역을 떠돌아 다니는 것이 현실이다. 문화예술교육 활동의 대부분은 자신의 예술행위가 예술가이자 교육자였을때, 자신이 속한 문화에서 펼쳐지고 소통되는 것에 대해 경험하지 못했다. 그런 활동으로는 자신의 생계와 지속적인 창작이 불가능 하다는 경험적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전에 예술행위가 마을에서 펼쳐져서 먹고살수 있고 지속가능하다는 인식이 없다는것이다. 그런 활동을 배우지도 못했고 그런 환경을 만날수도 없었고. 심지어는 예술이 독특하고 비범하다는 것에 너무 천착해 있었다. 우리의 가족과 이웃은 이것을 이해하고 소통할만한 대상이 아니라는 인식이 10여년전까지 문화예술교육이 활성화되기 전까지 우리의 문화의 생각인것 같다.


 이 생각은 아직 시효가 남아있다. 지금도 마을의 예술, 문화, 교육의 활동들은 여전히 비범한 사람들의 활동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렇다고 아무나 다 할수 있다거나 주민이 다 할수 있다고 되는 문제는 아닌 것이다. 문화적인것이고 살면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 우수한 사람들이 모자란 사람들을 대상으로 훌륭한 예술도 선보이고, 어려운 지식교육을 받을 복지도 제공하고 있다.

 

 문화예술강사들이 현장까지 내려오고. 공공예술지원 하면서 작가들이 제도의 의도로 해석해야 하는 을의 입장이 생기고, 이제는 마을운동까지 그 어떤 단체의 대표라던지 특정 사람들의 하부에 다른 노예적 노동자들이 생기고 있다. 마을은 돈이 없어도 자유로운 곳이고 일대일 만나는 곳이었는데. 일대일로 만나지 못하고 주민들을 프로젝트에 활용하면서도 그런 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하고있다.

 

 문화예술교육이 마을에서 활동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그곳에 거주하지 않더라도 그 마을의 역사와 문화라는 환경, 한 사람의 성장과 발달과정, 주민들의 사회생태, 마을에서의 노동과 공동체 활동, 마을의 공간성과 장소성, 인간의 생애와 동시대의 공존에 대한 자기 사유와 성찰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대상지 마을에 대한 탐구를 매번 진행하라는 것이 아니라 문화예술교육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 그와 같은 문제를 직면하고 사유하고 해결하는 과정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한 사람에 불과하다. 누구나 스스로 온전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잠재된 욕구가 있고, 스스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 만이 공동체의 구성원이 될 수 있다.


 공동체 문제에서 어려운 것은 스스로 살지 못하는 사람이 들어오면 공동체 전체가 고통스러워진다. 공동체의 전제조건 중 하나가 스스로의 삶을 스스로 살아낼수 있기 위해 공동체 활동을 하거나 그런 준비가 된 사람이 공동체에 들어와야 한다는 것이다. 단독된 삶이 가능한 성장과정과 사회적 관계를 지닌 사회여야 우린 모든 삶과 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인 자기 형성과 더불어 이뤄지는 삶의 과정을 획득할 수 있다.

 

 한 마을이 이것의 완결된 환경이라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더 진화하고 더 선명한 삶을 살기 위해 이사할 수 있다. 자연을 관찰할 수 있고, 삶을 성찰하는 이웃들이 있으며, 사랑을 속삭이면서도 밤길이 안전하고 소박하지만 함께 일하고 그 일을 함께 기념하는 잔치가 있는 곳이라면 저라도 가고싶다 하지만 갈 수 없습니다. 그런 곳이 어딘지 잘 모르겠다.(웃음)

 

 모든 우리 인생은 어차피 역정속에 있다. 러시아 교육학자 비고츠키가 이야기 한 내용을 옮긴 것이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 자기 인생의 역정 속에 있어서 교육을 표준화 시킨다는 것이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의 삶을 성찰하고 자신의 생활적 노동을 소중하게 수행해야 한다. 전면적 인간이 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웃들에 대한 위로와 존중을 표하고, 하나의 사물과 하나의 표현과 하나의 의미를 대화하여 가는 것이다. 오늘 하루 생존을 위한 기술을 활용하고 삶의 문제들을 해결할 지혜가 동원되었다면 보람찬 하루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오늘을 살아남기 위해 내가 어떤 기술을 동원했느냐. 밥, 청소, 모기장을 칠수 있느냐, 누군가 건널수 있도록 징검다리를 놓을수 있느냐. 이런 생존의 기술을 활용했다면 보람된거고 그런 것들을 배웠어야 했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한 사물과 한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여 가는 교육이 필요하다.


 2000년도 후반쯤에 대안교육쪽 한분하고 이야기를 하다가. 우리가 대안교육한다고 아이들에게 많은걸 가르쳤는데 뭐가 남았는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예를 들어 한가지에 대해서만 1년 내내 가르쳤으면 뭔가 성과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감자던 꽃이던 하나를 가지고 탐구를 하면 역사, 문화, 성분, 모양, 음식, 이것이 어떻게 유통되는지, 이것으로 만들어진 시, 영화,굉장히 많은 것을 다룰 수 있었을텐데, 하나에 대한 것을 탐구하지 못하고, 굉장히 복잡하게 이 아이의 삶의 대안과 사회적 대안을 다 가르치려고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한적이 있다. 그런게 아마 지금의 문화예술교육이 주는 메시지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표피적이거나 단편적이다. 9시 뉴스랑 같다고 보시면 된다. 예를 들면 첫번째 뉴스는 증권 조작에 대한 뉴스 두번째는 삼성전자 매출이 얼마나 올랐는지 나오고, 그다음은 연탄배달을 해주는 복지활동이 나온다. 이게 연결이 안된다. 기업의 주가 조작과 독점적인 자본과 그래서 생기는 빈민들의 관계망을 설명하지 않는 것과 비슷한 프로그램들이 굉장히 많이 돌아다니는 것이다. 단편의 연속이 아니라, 단면을 통찰하거나 통합적으로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직업과 노동이 노예되지 않게 하고, 온전히 자신을 저해하는 나쁜 정치와 싸워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의 문화와 예술과 교육은 인간의 전면성과 단독성을 기반으로 공동체의 창조적 해석을 풍요롭게 해야한다.

 

 그것이 확인되어져야 공동체에 대해 창조적으로 해석하고 참여할 수 있다. 인간의 전면성과 단독성에 대한 개념이 없으면 프로그램에 단편성으로 관계되고 교육되고 성과로 규명하려고 한다.


 마지막으로 죽는 날에도 이런 이야기들로 장례가 채워질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 아이들도 이런 이야기를 하며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 가난하더라도 삶의 전면적인 이야기를 하는 아이들이 살아가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

 

 

- 방담회 순서

#0. 프롤로그 : 마을에서의 교육을 사유하다  [Click!]

#1. 마을에서 문화예술교육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Click!]

#2. 삶의 기술을 담은 문화예술교육 '장소'로서의 마을에 대해 생각한다 [Click!]

#3. 나오기 : 마을에서의 '경험교육'이 가능하려면, [Cl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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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봄봄

 

 

 경기문화재단 지역특성화 문화예술교육사업 “Moving School : 깊고 심심한 동네읽기”는 지역사회의 유․무형 자원을 조사 탐색하면서 문화예술교육이 생동하는 장소로서의 지역이 갖는 가치를 발견하고 드러내고, 이 과정에서 형성되는 주민들과의 관계로부터 자발적 모임과 활동을 촉진 매개하는 생활문화공간의 창출을 목표로 한다. 

 
 그런데 ‘지역’이라고 부를 때는 왠지 사람이 빠져 있는 느낌이 든다. 그 이유는 공단지역, 산림지역, 청정지역, 군사지역, 우범지역, 아파트밀집지역, 상가지역, 재개발지역 등 사회행정 영역의 도구적 차원에서 분류되고 지명되는 개념이기 때문일 것이다. ‘마을’이라고 할 때는 좀 달라진다. 그곳에서는 전통과 지리적 특성, 문화, 그리고 무엇보다 그곳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 마을의 주인들의 삶이 드러난다. 최근 마을공동체운동의 흐름들이 공통으로 지목하는 마을의 개념에 ‘공유’, ‘주민자치’, 그리고 ‘삶의질’이 포함되는 이유일 것이다. 그래서 이번 지원사업은 ‘마을을 위한’ 혹은 ‘마을에 의한’ ‘마을에서의’ 문화예술교육사업’ 이라고 해야 더 적절할 것이다. 그리고 주인이 없는 지역을 사람들의 삶의 관계가 있는 주인있는 마을로 변화시켜가는 문화예술교육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를 찾아내고 실행하는 것이 이번 사업의 과제라 할 수 있다. 
 

 (사)예술과텃밭의 <텃밭살롱-예술로고양학 시리즈1>은 이번 경기문화재단 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지원사업의 목적이나 추진방향에 가장 근접한 기획으로 심의과정에서 관심을 모은 프로젝트다. 물리적인 공간에 불과한 지역을 주민들과 함께 어슬렁거리며 관찰하고, 기억과 경험을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개입하면서 커뮤니티를 촉진하고 주인이 있는 장소로서의 마을로 변화시켜간다는 전략을 가진 이 프로젝트는 3월부터 10월까지 매주 1~2회 정도 지역예술가와 시민단체활동가, 그리고 주민들이 만나면서 고양시의 덕양구 화정동과 행신동 및 그 주변지역을 중심으로 탐방, 인터뷰, 강의를 진행하고, 이러한 과정에서 발견된 사람과 이야기를 출판을 통해 공유 확산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1990년대 지역재개발과 신도시건설이라는 정책으로 마을이 쓸려가고,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누구도 기억해 주지 않을 그 희생 위에 우리는 편리하고 안전한 삶을 누리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 <초록물고기>의 배경이 된 도시가 바로 이곳 고양 일산이다. 그런 만큼 옛날을 이야기하는 주민들은 남아있을 리 없고, 새로운 시절의 주인이 된 주민들이 생겨나기에는 시간이 없었던 곳 또한 바로 이곳이다. 또한 화정역이 위치한 덕양구는 4층까지로 고도제한개발주택지역과 초고층 건물이 빽빽이 들어선 상가지역이 서로 다른 왕국인양 분리 공존하는 지역으로서, 예술과텃밭의 텃밭살롱 프로젝트가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주인이 될 새로운 주민과 동네의 이야기를 형성하려고 시도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지난 5월30일 저녁 7시쯤 지하철3호선 화정역 광장에는 이 프로젝트를 주관하는 예술과텃밭의 백현주 작가를 비롯해 아이쿱덕양햇살생협의 유미경 선생, 연극놀이교사, 최근 이 지역으로 이사한 주민, 청소년문제와 지역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은 나그네란 별명의 김경환 목사로 구성된 5명의 활동가들이 모였다. 이 날은 김경환 목사가 제안한 요르크 슈타이너의 <두 섬 이야기>라는 모티브로부터 고양시 덕양구 화정역을 중심으로 나눠진 두 개의 섬, 즉 초고층상가밀집지역과 저층주택밀집지역 중 저층주택밀집지역을 돌면서 그곳에 자리 잡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흘러가는 이야기들을 수집했다.

 

 김경환 목사는 10,000원이면 밥 한 끼 제대로 먹기 어렵다는 길 건너 고층상가지역과 달리 3,500원짜리 국수 먹고, 2,000원짜리 찐빵 사먹고, 2,000원짜리 사우나하고, 동네까페서 2,000원짜리 아메리카노 커피를 마셔도 500원이 남는다는 이 동네는 낙후함이라는 결핍이 오히려 축복일 수도 있고, 그래서 이해득실을 셈하는 머리보다는 마음이 먼저 움직이는 사람들이 둥지를 트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고 한다. 지역주민들의 커뮤니티 문화공간의 역할을 자처하고 생겨난 까페 ‘하쿠나마타타’도 그중 하나인데, 지나는 길에 차나 한 잔 할까 둘러보니 주인장은 “까페만으로는 영업이 어려워 저녁에는 주점을 한다”며 “다음에 꼭 한 번 들리고, 페이스북 같은데 자주 좀 올려 달라”며 당부한다. 하지만 낙후함이라는 결핍은 안타깝게도 이렇게 마음 내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축복보다는 많은 경우 ‘더 큰 섬’으로 가기 위한 경쟁을 낳는다. 50m도 채 안 되는 가까운 거리에 미장원이 4개나 몰려있고, 좁은 길 하나를 두고 마주 보는 채소 가게의 주인들은 잔뜩 물건을 가게 앞으로 진열해 두고 우리가 거리를 돌아보는 동안에도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오랜 시간은 지역을 사람 사는 마을로 만들기도 하지만 저절로 이뤄지는 법은 없다. 그 시간동안 사람들은 그 곳에서 함께 살기 위해 유무형의 약속과 문화를 형성했을 것이고, 이는 그 세월만큼 살아온 자연물과 더불어 누구 것이라거나 누가 처분할 수 있다거나 할 수 없는 공유재산이 되어 있을 터였다. 누구도 맘대로 할 수 없는 공유재산이다보니, 그것의 처분이나 집행도 함께 의논했어야 했고, 그 의논의 방향은 그곳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위한 것이었을 터이니 그 과정은 다른 누가 대신할 수 있는 게 아닌 자치였고, 운영을 위한 리더십도 형성되었을 것이다.

 

 

 

 

 사람들의 감각에 호소하는 즐거움, 정화, 소통, 환상, 비판 등의 직관적 성격으로 더 나은 삶 혹은 지금과는 다른 삶에 기여할 수밖에 없는 문화예술은 그 특유의 ‘쓸데없음’ 혹은 ‘돈안됨’으로 인해 그 사회구성원들의 이해득실에서 비켜난 ‘무관심한’ 공유와 삶에 대한 상호영향이 생기도록 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개인적일 수밖에 없는 감각에 호소하면서도 그것이 구성원 간에 공유되고, 사회 구성원들의 전체적인 삶에 영향을 끼치는 과정으로 나아가는 ‘경험’은 문화예술을 통해서는 쉽게 일어나고, 이러한 경험들이 이야기가 되고 쌓이는 곳이 장소가 마을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끌어내고 촉진하는 문화예술은 그 자체로 내면으로부터 끌어내는 교육Eduke과 밖으로 자유롭게 실천하는 교육Praxis인 것이며, 마을은 문화예술이 교육적 경험으로 완성되는 장소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예술과텃밭의 <텃밭살롱-예술로고양학 시리즈1>은 이제 막 시작된 프로젝트로서 편의적 개념으로 분류된 공간으로서의 지역이 주인이 있는 장소로서의 마을로 변해가는 100년쯤 걸릴 시간을 조금 앞당길 수 있는 프로젝트다. 그러는 동안 갈등하고 싸우고 부서지고 흩어져버릴지도 모를 삶과 마음을 문화예술적 수다모임에서 생겨나는 이야기와 관계로 조금은 다른 삶, 그 과정이 즐거움과 소통, 그리고 치유적이어서 덜 고통스럽도록 모아내고 경제적 이해득실 외에도 기억이나 재미 등과 같이 나눌게 있어서 공존할 이유가 있도록 하는 프로젝트다. 그래서 우리가 ‘마을’, 그리고 ‘공동체’라고 이야기 할 때 기대하게 되는 ‘정’이나 ‘협동’, ‘자치’, 그리고 ‘공동의 기억’ 등의 ‘이웃성’을 아직 발견할 수는 없지만, 함께 지역의 이야기와 지역에서의 경험을 일상으로 쌓아가는 사람들이 각자 바쁜 삶에도 불구하고 즐겁게 모일 이유가 있는 상징으로서의 ‘텃밭’을 유지해 간다면, 건강한 생태의 속도만큼 백년은 걸릴지 모를 시간동안 천천히 많은 것이 변해가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경기문화예술교육 웹진 지지봄봄 http://www.gbom.net/

지지봄봄

 

 

 푸르른 녹음이 시작되던 6월의 따뜻한 어느날, 지역에서 오랫동안 문화예술교육을 기획하고 실행해오신 <대안문화학교 달팽이>(이하 ‘달팽이 학교’)를 만나기 위해 안성으로 갔습니다. ‘달팽이 학교’는 2001년부터 지금까지 문화예술교육을 통해 지역문화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하셨고, 실제로 그러한 경험과 성과가 많다고 익히 들어왔기 때문에 가는 동안 기대가 되었습니다.

 

멀리 보이는 홍익아파트와 주변 마을 ⓒ 지지봄봄

 

 

 

 ‘달팽이 학교’가 위치 한 곳은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의 한적한 논과 밭 사이에 있는 건물이었습니다. 원래는 한경대에서 농대 실습장으로 활용하던 곳이었는데, 관련학과가 폐지되며 몇년간 사용을 하지 않던 건물을 올해부터 달팽이 학교에서 운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달팽이 학교가 위치한 이 곳에 약 13~4년 전에 3000세대의 대규모 임대아파트(홍익아파트)가 생기며 타지역의 젊은 세대가 이전을 해왔다고 해요. 주로 젊은 부부이거나 학생이라고 하는데, 원주민과의 주거 환경과 생활방식의 차이로 마을 간 소통이 점점 단절되고 있는 것에 문제의식을 느껴 이번 프로젝트를 기획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번 프로젝트에는 홍익아파트를 중심으로 신기, 양협마을의 청소년과 어른이 함께 참여하여 주민들이 마을 공간을 읽고, 디자인하는 작업을 진행하신다고 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서로 소통의 기회를 늘리고 지역 공간에 대한 감수성을 발견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지지봄봄에서 방문했던 날은 아이들이 벽화작업을 하는 날이었는데요, 특이하게도 벽이 아닌, 철판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기존 벽화작업이 시간이 지나고 나서 수정이 불가한 경우에는 마을의 흉물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아, 철판에 그림을 그리고 마을 벽에 설치를 하는 식으로 대안을 찾으셨다고 합니다. 벽화를 수정하거나 철거하는 것이 훨씬 수월해 기존 공공미술로서 벽화가 가진 문제를 어느정도 보완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다보니 이제는 다른 마을에서도 벽화 요청이 들어올 정도로 수요가 늘었다고 해요.

 

 

 

 

벽화를 그릴때에도 무조건 예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닌, 최대한 마을의 이야기를 담아 제작하려고 하신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는 참여하는 아이들이 스스로 발견하고 상상하여 담아낸다고 하니 그 어디에도 없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벽화가 탄생하는 것이죠. 이번 프로젝트에서도 옹기그릇으로 유명한 양협마을은 옹기를 주제로, 신기마을은 전통문화를 주제로 하여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아이들 ⓒ 지지봄봄

 

 

 

이기원(달팽이 학교 교장)선생님께서는 벽화를 왜 그리는지, 어떤 그림을 그리고 싶은지 등의 질문을 던지는 것이 이곳에서 교사의 역할이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아이들에게 최대한 실패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여 되도록 처음부터 다시 하게 되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해서 벽화를 그릴 수 있도록 하신다고 합니다. 이렇듯 오랫동안 지역 마을에서 아이들을 만나와서 그런지 참여하는 아이들이 가진 달팽이 학교에 대한 신뢰도 두터웠습니다.

 

대안문화학교 달팽이 이기원 굦ㅇ선생님 ⓒ 지지봄봄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는 맹주희(고3)양도 “일반 학교는 공부만을 강조하고 정해진 교육의 틀이 있어 그것을 따라야만 하지만, 달팽이 학교는 자기가 하고 싶은 활동도 하며 자연을 느낄 수 있어서 좋다.”며 달팽이 학교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습니다.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만난 아이들과의 관계는 프로그램 종료 후에도 지속되어, 고민이나 진로에 대한 상담도 종종 하신다고 합니다. 특별한 상담 프로그램이 아니라, 그저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동등한 입장에서 비슷한 상처를 공유하는것 만으로도 아이들은 위안을 받고 살아갈 힘을 얻었다고 하네요. 이 대목에서 마을에서의 학교의 역할에 대해 잠시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지식의 전달만이 아닌, 삶의 지혜를 나누고 든든한 정서적 버팀목이 되어주는 ‘어른’이 내가 사는 곳 가까이에 존재한다는 것과 그러한 어른과 했던 소통의 경험은 분명 아이들이 살아가는데 큰 힘이 되겠지요.

 

 

 

 

지난 3월 부터 시작한 이 벽화작업은 6월 말에는 마을에 설치가 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 외에 마을 사람들이 쉬어갈 수 있는 쉼터를 만드는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고 해요. 이기원선생님께서는 달팽이 학교가 원래 있던 곳에서 올해 초에 이곳으로 이사해 이 전 공간보다 아이들이 편히 쉴수 있는 공간이 부족하다고 아쉬움을 털어놓으셨는데, 아마도 이번 프로젝트의 과정을 통해 차근차근 아이들과 마을 주민의 안락한 소통의 공간으로 자리잡아 가시리라 생각이 드는 현장이었습니다.

 

 

 

 

 

경기문화예술교육 웹진 지지봄봄 http://www.gbom.net/

 

 

 

지지봄봄